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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Aussie / 인물





                                                                        BRETT





                                                  WHITELEY






                                                          브렛 화이트리












                ✚ 생애

                브렛  화이틀리는  1939년  4월  7일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에서  출생했다.  시드니  교외의  롱그빌
                (Longueville)에서 자랐고, 장로교에서 만든, 초등부터 고등까지 전 교육을 책임지는 기숙사 학교인 스
                콧츠에서 교육을 받았다. 아주 이른 나이에 드로잉을 시작했고, 십대 때는 주말마다 뉴사우스웨일스의
                                                                                                         직업
                서부 중앙이나 캔베라에 나가 유화를 그렸다.
                시드니 서쪽 달링허스트(Darlinghust)에 위치한 국립미술대학(NSW)에서 브렛은 1956년부터 1959년
                까지 드로잉을 배웠고, 시드니의 줄리안 애쉬튼 미술학교)(Julian Ashton Art School)를 졸업했다. 러                       화 가 _  1939년 4월 7일
                셀 드라이스데일의 심사로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1959년 장학금을 받게 되어 1960년 1월 23일 유럽
                으로 떠났다.

                ✚ 런던 시절

                런던의 공공기관인 화이트채플 갤러리 관장인 브라이언 로버트슨(Bryan Robertson, 1925~2002)을           ✚ 후기 시절
                만난 뒤에 브렛은 1961년 <근래 오스트레일리아 회화(Recent Australian Painting)>란 그룹전에 작
                                                                                         브렛은 점점 더 알콜에 의존하게 되었고 마침내는 헤로인에 중독되기에 이른다. 미술
                품을 출품했다. 그의 빨간색 무제 페인팅을 테이트 갤러리(Tate Gallery)에서 사갔고, 그는 지금까지도
                                                                                         시장에서의 그의 상품 가치는 점차 올랐지만 당연히 모든 비평가들이 그의 작품을 높
                테이트가 소장한 최연소 작가로 이름을 남기고 있다. 1961년 브렛은 유네스코에서 후원하고 국제조형
                                                                                         이 평가하지는 않았다. 그는 술을 끊고 알콜중독을 치료하려고 여러 차례 노력했지만
                예술협회 프랑스 위원회에서 주최한 파리 세계청년화가대회에 오스트레일리아 대표로 참가했고, 다
                                                                                         매번 실패했고 뮤즈라고 부르던 그의 아내 웬디와 1989년 마침내 이혼하고 만다. 브
                시 런던으로 돌아가 1962년 웬디 줄리우스와 결혼했다. 2년 뒤인 1964년 무남독녀로 아키를 낳았다.
                                                                                         렛은 퀸스랜드 출신의 모델이자 메이컵 아티스트인 제니스 스펜서(Janice Spencer)
                                                                                         와 연애하면서 일본 등 해외 각지로 여행을 떠났다. 죽기 전 마지막 4년동안 뉴사우스
                ✚ 뉴욕 시절
                                                                                         웨일스 미술관이 그의 집과 작업 공간을 브렛 화이틀리 스튜디오(the Brett Whiteley
                1967년 브렛은 뉴욕시의 연방재단연구비(Commonwealth Fund Fellowship)를 받아 뉴욕에서 공부하        Studio) 미술관으로 개조했다. 그리고 1991년에는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로부터 오피
                고 작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가 뉴욕에서 받은 첫인상은 <뉴욕 1>(1968)과 같은 작품에서 엿볼 수             서 훈장(an Officer of the Order of Australia)을 수여 받았다. 하지만 그 다음 해인 1992
                있다. 미국이 그에게 미친 영향 중 하나는 그의 작품 사이즈가 커진 데 있다. 그는 당시 미국 평화운동의               년 그는 아편 과다복용으로 인해 뉴사우스웨일스 티룰(Thirroul)에 있는 한 모텔 방에서
                영향을 받아 1960년대 베트남 반대운동에 가담하기도 했다. 그 때의 대표적인 그림이 1년 내내 하루                 숨진 채 발견되었다. 그의 나이 53세였다.
                종일 매달려 유화와 꼴라쥬와 각종 것을 이용해 나무판에 만든 대작인 <아메리칸 드림>(1968~1969)
                이다. 이 작품의 많은 부분은 알콜과 마리화나와 기타 약물을 복용한 그의 경험에서 온 것이기도 하다.
                22미터에 달하는 그 작품은 꼴라쥬, 사진, 플래쉬 라이트 등으로 화려하게 마무리 되었다. 하지만 그                 ✚ 수상
                와 전속계약을 맺은 말보로 거슨 갤러리(Marlborough-Gerson gallery)는 그 작품을 전시하고 싶어하
                                                                                         1976    Archibald Prize (Self portrait in the studio) /
                지 않았고, 브렛은 그 때문에 너무 마음이 심란해져서 뉴욕을 떠나기로 마음 먹었다. 그는 피지섬으
                                                                                                     Sulman Prize (Interior with time past)
                로 휴식 차 떠났다.
                                                                                         1977    Wynne Prize (The Jacaranda tree - On Sydney Harbour)
                                                                                         1978    Archibald Prize (Art, Life and the other thing) /
                ✚ 연금술 시기
                                                                                                     Sulman Prize (Yellow nude) /
                1969년에  오스트레일리아로  돌라온  화이트리는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연금술                          Wynne Prize (Summer at Carcoar)
                >(1972~1973)을 그렸다. 거대한 규모의 이 작품은 일종의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정신세계              1984    Wynne Prize (The South Coast after rain)
                를 표현한 것으로, 그는 자신의 미술에 영향을 주었던 요소들을 이 그림에서 모두 다루었다.                       1999    Wynne Prize (The Jacaranda tree) (1977)


                                                                                                               * 마이 오지 페이지는 호주와 관련된 국•내외에서 유명한 인물을
                                                                                                                매주 한명씩 소개하는 코너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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