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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Education / 교육
바로크 시대의 프랑스 무용가이자 음악가
장바티스트 륄리
마이라이프
(Jean-Baptiste Lully) QR코드 스캔하고
명곡 듣기 ▲
바로크 시대의 프랑스 무용가이자 음악가. 이탈리아 결국 해고된다. 사생활
태생이나, 루이 14세 치하에서 궁정 음악가로 일생의 륄리는 양성애자와 난봉꾼으로 악명 높았다. 1662년 그는
대부분을 보냈다. 루이 14세와의 만남 륄리의 친구이자 동료 음악가인 미셀 랭베르의 딸, 델레인
20살 때인 1652년경, 륄리는 프랑스 궁정의 랭베르와 결혼했으며, 아내와의 사이에서 10명의 아이를
음악적으로는 전형적인 바로크 양식이었으며, 당대의 바이올리니스트와 무용수로 왕실과 인연을 맺었다. 이듬해 낳았다. 륄리는 자신의 지위는 전혀 의식하지 않고, 그의
이탈리아 오페라 양식을 프랑스에 이식하여 프랑스 그는 프랑스 왕을 위한 작곡가가 되었다. 륄리는 루이 14 시종인 Brunet과의 관계를 과시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오페라의 기틀을 잡았고, 루이 14세의 궁정용 무용 음악과 세를 위해 발레곡을 많이 작곡했다. 대표적인 곡이 '밤의 륄리는 매우 높은 위치에 있었지만, 그의 소년과 여자들과의
발레 안무를 다수 창작하였다. 마랭 마레 등 걸출한 발레'(프랑스어: Ballet de la Nuit)인데, 〈밤의 발레〉는 애정 행각은 여러 차례의 추문으로 번졌다.
후배들에게 작곡을 가르치기도 했다. 이탈리아 출신이지만, 볼거리가 풍성한 아주 스펙터클한 작품이다. 루이 14세는 이는 루이 14세에게 큰 불쾌감을 불러일으킬 정도였으며,
누구보다도 프랑스적인 인물이 되었고, 이탈리아 음악을 일곱살 때부터 춤에 관심이 많았었는데 륄리는 이곡을 만들 륄리는 ‘남색가’라고 불릴 만큼 유명하게 되었다.
상당히 배격하였다. 예를 들어 그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때 당시 15세였던 루이 14세가 자신의 춤 실력을 마음껏
특징인, 대화인 레치타티보와 노래인 아리아로 나뉘어지는 발휘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루이 14세는 1653년에 파리의 이러한 추문에도 불구하고, 륄리는 항상 루이 14세의 위엄을
걸 배격하고, 이 둘이 연속적으로 이루어지는 음악 비극 쁘띠부르봉에서 있었던 공연에 직접 배우로 참여하였다. 회복하도록 조욜하였다. 왕은 륄리를 자신의 음악적 여흥에
(Tragedie lyrique)이라는 형식을 만들었으며, 이 오페라는 4막으로 구성된 이 작품에서 루이 14세는 화려한 의상을 필수적인 사람이고, 그의 몇 안되는 진정한 친구 중 하나로
프랑스식 오페라의 기반이 되었다. 이러한 형식은 쟝 필리프 입고 여섯 인물의 배역을 소화했는데, 그중에서 그리스 생각했다. 1681년 륄리는 루이 14세를 위한 궁정 비서로
라모와 그 후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루크로 이어지며, 신화에서 태양을 관장하는 아폴론으로 분장하여 '떠오르는 임명되면서 귀족이 되었다. 그후에 륄리는 자신의 이름을
글루크빠였던 리하르트 바그너의 악극에까지 영향을 태양'이라는 상징적인 역할도 맡았다. 이 일을 계기로 루이 장바티스트 데 륄리라고 적었고, 그 후로 ‘륄리 경’으로
주었다고 할 수 있다. 14세는 ‘태양왕’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불리게 되었다.
어린 시절 륄리는 루이 14세와 그 자신이 춤을 추던 1650년대와 60 죽음
이탈리아 투스카니 대공국의 피렌체에서 방앗간 주인인 년대에 왕을 위한 많은 수의 발레곡을 작곡하였다. 그는 1687년 1월 8일 륄리는 루이 14세의 최근의 병상에서의
로렌초 룰리와 카테리나 델 세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륄리는 몰리에르의 희극을 위한 음악 - 《강제 결혼》(1664), 《사랑의 회복을 기념하기 위해서 《테 데움》을 지휘하였다. 륄리는
음악이나 다른 과목에서 거의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기타와 의사》(1665), 《서민귀족》(1670)을 작곡하면서 엄청난 성공 그 당시의 지휘 방식대로 바닥에 긴 막대기를 내리치면서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춤을 추는데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다. 을 거두었다. 루이 14세는 점차 나이가 들게 들고, 그의 박자를 맞추었으나, 발가락을 치게 되어 농양을 야기하였다.
14살때인 1646년, 기즈 공의 눈에 띄어 프랑스로 따라가게 춤실력이 떨어지게 되면서(왕의 마지막 공연은 1670 그 다리는 괴저가 생겼고, 륄리는 발가락을 잘라내는 것을
되고, 거기서 식기실의 일꾼으로 몽팡시에 부인을 위해 년이었다), 발레에 대한 관심이 점점 사그라들게 되면서, 거부함에 따라 병이 퍼지면서, 결국 3월 22일 륄리는 죽음을
일하게 된다. 이점에 대해 논란이 있으나, 사실 륄리는 륄리는 오페라에 종사하게 되었다. 륄리는 장바티스트 맞이하였다.
부인에게 이탈리아어를 가르치도록 고용되었을 가능성이 콜베르와 왕의 후원으로 피에르 페랭이 오페라에서 누리던 륄리는 그의 마지막 오페라인 《Achille et Polyxene》을
있다. 몽팡시에 부인의 도움으로 륄리의 음악적 재능이 특권을 차지하게 되었다. 새로운 특권은 기본적으로 미완성으로 남겼다. 죽음이 가까워진 병상에서 륄리는
개화된다. 륄리는 음악 이론을 니콜라스 메투르 밑에서 륄리에게 그가 죽을 때까지 프랑스에서 모든 음악 상연에 “Bisogna morire, peccatore(너는 죽어야 한다, 죄인이여)”
배운다. 그러나 륄리가 지은 후원자에 관한 천박한 시로 인해 관한 통제권을 가져다 주었다. 라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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