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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Education / 교육
독일의 고전주의 대표 작곡가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루크
마이라이프
(Christoph Willibald Gluck) QR코드 스캔하고
명곡 듣기 ▲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루크(Christoph Willibald Gluck, 작곡하였으나, 공교롭게도 영국에 내란이 일어났기 때문에 가수의 기교 과시나 필요 이상의 음악적 장식을 가능한 한
1714년 7월 2일 ~ 1787년 11월 15일)은 독일의 작곡가로 어느 곡도 평판을 얻지 못하였다. 배제하여 단순한 기법을 쓴다. 악기는 막의 상황에 따라
고전주의 시대에 중요한 작곡가 중 하나이며, 특히 〈 알맞게 선택되어야 한다.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로 유명하다. 다음해 독일에 가서 드레스덴 근교의 비르니츠에서 오페라
한 곡을 상연하고, 이 기회에 밍고티의 오페라 순회공연단에 서곡을 극 전체의 분위기와 밀접하게 관계지어야 한다. 합창,
그는 후원자였던 프랑스의 왕비인 마리 앙트와네트의 참가하여 유럽 각지를 순회 연주하였다. 1750년(36세) 빈의 춤, 무대장면, 무대효과 등은 극적인 명확함을 위해 통일성을
음악 교사로서도 유명하다. 일부에서는 글루크를 적어도 거상(巨商) 딸인 마리안네와 결혼하였는데, 두 사람은 일생 갖게 해야 한다." 등을 강조하고 있다. 글루크는 이처럼
오페라에선 로코코와 고전주의 시대의 음악의 아버지로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였다. 1752년부터는 빈을 중심으로 이탈리아 오페라, 프랑스 오페라, 독일 오페라 등이 지니는
여긴다. 글루크의 드라마적이지 못한 요소는 모두 배제한 활약하여 그 무렵부터 프랑스 오페라 코미크의 영향을 받은 각 양식을 융합하여, 가수에 편중하는 오페라에서 '음악을
오페라 개혁은 음악의 역사에서 큰 전환점이었다. 작품을 남겼다. 1761년부터는 대본작가 칼차비지(Ranieri 대본에 봉사케 하는 오페라'로의 개혁을 이룩하였다.
Calzabigi)와 협력하여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
일생 알체스테(Alceste)> 등을 작곡하였으나 이탈리아의 오페라 대표 작품
글루크의 아버지는 체코 보헤미아의 여러 지방에서 귀족의 부파의 인기에 눌려 별로 호평을 받지 못하였다. 오페라 글루크는 당대의 주류인 이탈리아 오페라가 너무 식상해졌고,
삼림관(森林官)으로 근무했던 사람으로, 따라서 그의 작곡가로서의 글루크의 최후 무대는 파리였다. 음악적 기교나 장식이 지나쳐서 극의 흐름과 무관하게
소년시절은 식구들과 함께 여기저기로 거처를 옮기는 1772년, 프랑스 대사의 권고에 의해 프랑스 오페라를 작곡할 음악적 화려함만을 추구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서곡은 극
생활이 계속되었다. 것을 결심하고, 1774년 <타우리스의 이피게네이아>가 분위기와 연관이 있어야 한다든가, 기교 과시나 불필요한
파리에서 대성공을 거두고 프랑스 오페라풍으로 제작한 음악적 장식 대신 단순한 기법을 써야 한다고 강조하는 등
17세경, 아버지의 반대를 뿌리치고 집을 나와 프라하로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등이 그 뒤를 이었다. 당시 오페라의 음악은 극의 내용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오페라
가서, 프라하 대학의 철학과에 적을 둠과 동시에 음악활동도 파리 오페라계에는 글루크를 미는 프랑스파와 피치니의 개혁 운동을 일으켰다.
시작하였다. 이탈리아파 사이에 대논쟁이 일어나 두 사람은 <타우리스의
이피게네이아>를 작곡하여 실력을 겨루었으나 결국 작곡가로써 선배인 요한 아돌프 하세와도 경쟁 관계였는데,
1736년, 빈에서 로브코비츠공(公)의 실내악 연주자가 되어 글루크의 실력이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하세는 그의 오페라들을 언짢아하며 "코믹 오페라는
그 곳에서 이탈리아 오페라를 많이 들을 기회를 얻었으며, 그 후 파리를 떠나 빈으로 돌아와서 은퇴와 다름없는 생활을 목소리를 상하게 한다"라는 입장을 가졌다고 한다. 반응은
또한 다음해 이탈리아에서 교회음악 및 전고전파의 하다가, 1787년 빈에서 73세의 일생을 마쳤다. 당연히 구식 작곡가라고 비웃은 것이지만.
기악작곡가로서 유명했던 삼마르티니(G.B.Samartini,
1700-1775)에게서 가르침을 받아 최초의 오페라 < 글루크의 가극개혁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오페라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아르타세르세(Artaserse)>를 발표한 이후 이탈리아 오페라 1769년에 빈에서 출판된 <알체스테>의 악보에는 글루크 (Orfeo ed Euridice)》를 꼽을 수 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작곡에 의욕을 갖게 되었다. 그 후 글루크의 오페라는 평판이 오페라에 대한 새로운 이상이 명백히 기록되어 있다. 기반한 3막의 오페라로,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도 빈에서
좋아져, 밀라노, 베네치아, 크레마, 토리노 등 이탈리아의 1762년에 초연되었다. 이 작품은 독일 오페라 중 매우 중요한
여러 도시에서 1744년(30세)까지 오페라 8곡, 파스팃쵸 2 여기서 그는 "시는 음악표현의 기초가 되며 음악은 시에 작품이다. 내용은 그리스 신화의 오르페우스 이야기지만
곡을 계속 발표하였다. 1746년, 런던으로 가서 오페라 2곡을 종속한다. 아리아와 레치타티보의 구분이 없어야 한다. 원작 신화와는 달리 해피 엔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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