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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Education / 교육
런던을 그리워하는 파리지앵
레이프 본 윌리엄스-3
마이라이프
(Ralph Vaughan Williams) QR코드 스캔하고
명곡 듣기 ▲
결국 그의 마지막 교향곡인 9번은 타계 1년 전인 85살 때 받은 작곡가는 “대략 두 달 정도 걸릴 것이라고 예상하고 1907)로부터 전원교향곡(1922)에 이르는 일련의 작품은 이
완성됐고, 3개월 전에 초연됐으며, 숨을 거둔 후에 녹음됐다. 받아들였지만 기왕 시작하려면 제대로 완벽하게 해야 한다는 민요에 쏠린 결과 생긴 것이었다.
결론에 이르렀고 결국 2년 정도 소요됐다"고 회상했다.
1952년부터 지휘자 에이드리언 볼트가 작곡가의 교향곡 본 윌리엄스는 대기만성형의 작곡가로 최초의 중요한 작품,
전곡을 처음으로 녹음하기 시작하자, 본 윌리엄스는 현장을 당시 본 윌리엄스는 찬송가와 민요뿐 아니라 뱃노래까지 합창과 관현악을 위한 〈미지의 국토로〉가 발표된 것은
직접 찾아가 감독하고 조언을 건넸다. 수수께끼같은 교향곡 800여 곡을 채집했고 이 작업을 통해 잠들어 있던 영국의 1907년, 35세 때였다. 이 스탠퍼드류의 고전주의에 물든
6번 마지막 세션에서, 그는 짦은 스케치가 연주될 때 볼트와 민속음악을 일깨웠다. 선율이 남아 있지만 노랫말이 사라진 작품은 그의 존재를 일부의 음악애호가들에게 인식시켰지만
오케스트라에 '이 이상으로 진심이 와닸는다'라고 감사를 작품은 작사자에게, 거꾸로 가사는 남아 있지만 멜로디는 그는 더욱 연찬을 쌓기 위해 1908년 파리에서 라벨에게 8
표했다. 레코드는 후에 LP음원으로 수록되었다. 그는 교향곡 유실된 곡은 동료 작곡가들에게 창작을 의뢰하면서 복원을 개월간의 개인교수를 받았다. 그 다음해에 발표된 가곡집 《
9번의 첫 녹음에 참여할 예정이었으나 8월 26일 교향곡 9 시도하기까지 했다. 훗날 본 윌리엄스는 “2년간 이 세상에서 웬로크의 봉우리에서》는 그의 독창성을 잘 보여준 작품이다.
번 녹음 세션하기 전야(前夜)에 세상을 떠났고 볼트는 이번 가장 최상의 것과 긴밀하게 교제한 것은 그 어떤 소나타나
녹음이 작곡가를 추모하는 것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시신은 푸가보다 훨씬 더 나은 음악교육이었다.”고 회고했다. 이는 그 후 교향곡 1번 〈바다교향곡〉(1910), 교향곡 2번 〈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다. 바르토크 벨라와 졸탄 코다이가 동유럽에서 현장 답사를 런던교향곡〉(1914)으로 세인의 주목을 끌었으나 제1차
거쳐 자신의 작품을 통해 민족음악의 발전을 이끌었던 세계 대전 중엔 간호병 및 포병사관으로 프랑스에 종군하여
작품 성향 시기와도 대략 일치한다. 한동안 창작활동은 중단되었다. 전후 왕립음악대학 교수와
1904년 10월 영국 모닝 포스트 신문에 영국의 민요에 대한 바흐 합창단의 지휘자로 임명되었으며 1922년 교향곡 3번
특집 기사가 실렸다. 기사는 에식스 일대의 민속음악 전통이 1912년 1월 본 윌리엄스는 “작곡가의 양식은 무척 〈전원〉을 발표하여 작곡가로서 부동한 지위를 확립하였다.
빈약하다는 걸 꼬집고 있었다. 이 기사를 읽고 당시 34살의 개인적이겠지만 그 개인 역시 한 나라의 구성원이며
한 작곡가가 반론을 보냈다. 가장 위대하고 잘 알려진 예술가들은 가장 국민적인 만년에는 난청으로 괴로움을 겪었지만 최후의 10년간에는
예술가이기도 했다. 바흐, 셰익스피어, 베르디, 월트 휘트먼은 4곡의 교향곡을 작곡하는 등 점점 정력적인 창작활동을
“저는 브렌트우드 근처의 인그레이브에서 방대한 민요를 모두 세계인이고자 했지만 예술적 영감의 출발점은 항상 계속하여 원숙된 작품을 남겼다. 작품으로는 앞서 나온 것과
채집해 왔으며 그곳에서는 ‘옛노래’를 부르고 있는 부인들이 민족이었다.”는 자신의 음악적 자의식과 지향점을 집약한 〈남극교향곡〉(제7번, 1953)을 포함한 9곡의 교향곡, 오페라
적지 않았습니다. (중략) 인그레이브만이 유독 예외적인 내용의 강연을 했다. 이런 작곡가의 생각은 20여 년 뒤인 〈소몰이 휴우〉>, 〈사랑의 존 폴스타프〉, 〈탈리스의 주제로
마을은 아닐 겁니다. 에식스만이 아니라 영국 전역의 모든 1935년 <민족음악>이라는 책으로 정식화되기에 이른다. 된 환상곡〉, 〈피아노 협주곡〉, 〈바이올린과 관현악을 위한
마을에 전통 민요를 발견할 수 있는 광대한 유산이 똑같이 콘체르토 아카데미곡〉, 〈미사곡 사단조〉, 오라토리오 〈성도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왕립음악대학(RCM)에서 휴버트 패리와 찰스 스탠퍼드에게 (聖都)〉 등이 있다.
배운 후 베를린에서 막스 브루흐에게 사사하였다.
이 편지를 보낸 주인공이 레이프 본 윌리엄스였다. 작곡가는 생전에 엘가를 잇는 영국 음악의 계승자로
케임브리지 대학과 영국 왕립음악대학에서 공부한 작곡가는 그는 영국의 민요와 튜더 왕조의 교회음악에 관심을 추앙받았지만, 엘리자베스 러천스 같은 영국 현대
한 해 전인 1903년부터 영국 민요를 수집하고 있었다. 당초 보였으나 특히 민요에 깊은 애착을 품고 스스로 노퍽 작곡가들은 ‘쇠똥’ 같은 음악을 끼적거린 것에 불과하다고
‘영국 찬송가의 과거와 현재’를 책으로 펴내자는 제안을 지방에서 민요를 채집하였다. 3개의 노퍽 랩소디(1906- 맹렬하게 비판했다.
[다음 주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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