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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의 한쪽 팔을 기저귀에 끼워 넣고 끝낼 만큼 꼼꼼한 정성없이 업무를 보는 것이어서 기가 찰 노릇이었다.


            내가 만일 확인하지 않았더라면 아내는 의사 표시를 못하므로 한 쪽 팔을 기저귀에 묶인 채로 불편하게 누워 있어야 될 형편이었다. 규정에
            의하면 환자  면회는 12시부터 밤 8시까지 이나 나는 아침 10부터 허락을 받아 매일 10시간을 아내를 돌보며 지냈는데 아침에 가보면 자고
            있는 얼굴이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 그래서 손을 잡으며 “ 여보 나왔어” 하고 귀에 대고 말을 하면 얼굴 표정이 풀리면서 그 때부터 종일
            편한 얼굴로 누워 있으며 나는 종일 아내의 온 몸을 지압하며 마사지를 한다. 내가 아내 곁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이 것 뿐이며 아내의
            의식이 돌아 오기를 학수 고대하는 것이다.


            환자의 가족이라고 해도 나만큼 절실한 사람도 없는 것이 자식들도 나름대로 자기들의 가족이 있어서 그런지 사리판단을 잘 해서인지 감정
            에 치우치지 않고 덤덤했다. 병원에서 특별히 환자를 살리려는 정성을 보이지 않아 나는 의사에게 말해 집에서 영양제도 갖다 먹이고 비공
            식적으로 환자가 반신불수가 되더라도 의식만 돌아오게 해주면 보너스로 현금 10만불을 주겠다고 제의하니 내 얼굴을 한 번 훌쩍 쳐다보더
            니 피식 하고 웃고 마는 것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10만불이 아니라 20만, 30만불이라도 기꺼히 줄 심산이었다. 그래서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한약과 침술도 알아 보고 시도해 보려 했으나 병원 의사의 대답은 과학적 근거가 없어서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이 병원에서 나가 너싱 홈이나 집으로 가 있으면서 하겠다고 하니 건강이 나아져야 나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러면 현재
            병원에서 환자의 건강을 호전 시키려고 하는 치료가 무어냐고 물으니 놀랍게도 대답은 “특별히 없다” 였다. 이 말은 바꿔 말하면 그냥
            있다가 죽어서 나가라는 말이나 다름이 없는 말이다. 죽어 가는 환자에게 여한이라도 없게 가능한 모든 치료를 해주고 싶은데 이 나라의
            이상한 의료 체계가 그 치료를 원천적으로 못하게 하니 발을 동동 구르며 울분을 토할 수 밖에 없었다.


            인간이 할 일이 없다고 해서 그러면 나는 인간이 아닌 신에게 간청하겠다고 하며 하나님께 매일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진작부터 무신론자였던 나 자신 이였기에 주
            위에 있는 독실한 신자 분들께 아내의 회생을 기원하는 기도를 부탁하기도 했다. 그리고 만약에 나의 기도가 이루어 진다면 지금부터라도 하나님의 충실한 일꾼이 되겠다는 약속도 잊지 않았다.

            코에 연명 호스를 넣은 지 1주일이 지나고 나서 부터 계속하던 말이 4주가 되니깐 환자가 음식을 소화하지 못하니 고통 없이 저세상으로 가게끔 튜브를 제거하자는 말을 간호사가 또다시 한다. 나
            는 코에 튜브가 있어 고통을 느끼냐며 음식을 섭취해야 환자가 회복할 기미가 보이니 설사 환자가 사망한 다음에 제거해도 되지 않느냐며 반문을 했으나 환자가 또 다시 뇌출혈을 일으켰다며 음
            식을 줘도 아무 소용이 없다고 했다. 지난 1개월간 뇌출혈 치료를 했다면 왜 뇌출혈이 또 재발하느냐고 항의하니 그걸 우리가 어떻게 아느냐고 어이없는 대답을 한다. 답답한 마음에 한국에 있는
            형과 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친구 의사나 이런 상황을 겪은 친구가 있으면 조언을 구하라고 했다. 그러나 변호사를 선임해서 현재 있는 병원에서 나오라는 조언뿐 다른 조언이 없었다.


            환자의 고통을 줄이자는 간호사의 말을 따라 코에 넣었던 튜브를 제거하고 아무런 통증을 못 느끼게 한다고 모르핀 주사를  놓기 시작하니 아내는 결국 이틀을 넘기지  못하고 숨을 거둔다. 가래
            가 끓는 거친 호흡을 힘들게 해서 가래를 흡입해 호흡을 조금 쉽게 하도록 해주면 안되냐고 했지만 흡입과정에서 환자의 호흡기를 다치게 할 우려가 있어 안된다고 하니 여기 병원의 의사나 간호
            사의 응답은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결국 아내가 숨을 거두니 살아 생전에 왜 좀 더 아내에게 잘 해 주지 못했나 하고 후회와 죄책감에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 내린다.

             주위에서는 나처럼 아내를 잘 챙기는 남편을 본 적이 없다고 하며 자책하지 말라고 하지만 나 자신은 같이 살 때 왜 좀 더 살뜰히 챙겨주지 않았나 하고 후회와 자책감에 너무 괴롭고 슬펐다. 아
            내가 건강이 좋지 않아 지난 4-5년 전부터는 일체의 가사 일을 하지 않고 내가 모든 가사 일을 도맡아 하고 3년 전에 새로 지은 이 집은 휠체어를 타고 집안을 다니게끔 내가 직접 디자인을 했는
            데 아내가 너무 좋아 했다. 바로 산자락이라  공기도 신선해서 피톤치트가 많은 지역이라며 손뼉을 치기도 했다. 3개월 전인가 아내가 생뚱 맞게도 정색을 하고 그간 자기를 성심껏 간호를 해주어
            고맙고 자기 역시 행복한 여생을 보내고 있다며 감사의 인사말을 하는 것이었는데 아마도 자기의 앞 날을 예측하듯이 생전에 나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인 것 같다.


            아내 생전에는 그 녀가 소파에 앉아 있기만 해도, 집안에 있기만 해도 지금 사는 건평 150평의 이 집이 크다고 느끼질 못했는데 아내가 없는 지금은 광활한 들판에 혼자 서있는 감정으로 어디 몸
            둘 바를 모르겠고 괜히 눈물만 주르르 흘린다. 그리고 지난 과거 생애를 거치면서 여행을 다니거나 애들 졸업이나 결혼 장면등, 집안에 크고 작은 아내의 사진이 39장 이나 놓여 있지만 늙어서 최
            근에 찍은 사진을 더 만들어 묘비에 삽입하고 타고 다니는 자동차 안과  매일 식사 때마다 앉는 식탁위등, 여기저기 올려 놓고 수시로 아내를 쳐다 보고 대화하듯 중얼거리며 마치 같이 생활하듯이
            해보지만 텅 빈 마음속은 조금도 채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같이 자던 침대 위에 있는 아내가 베고 자던 베게도 그대로 놔두고 있고 아내가 쓰던 모든 물건들을 있는 그 자리에 그대로 놔두고 있다.


            지난 주에 아내의 장례를 치루고 잘 정돈된 묘지에 아내를 묻었다. 교민 어느 분은 시립 묘지가 향후에도 땅 문제로 분쟁의 여지가 없다고 해서 가 보니 묘지 1기에 4500불 정도로 저렴 했으나
            울타리가 없어서 인지 주위가 산만하고 어딘가 모르게 황량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아담한 사립 묘지의 제일 비싼 묘지를 아내가 영면하는 유택으로 선택을 했다. 시립 묘지보다 20배나 비싼
            10만불이지만 나도 나중에 합장을 할 것이므로 아주 비싼 묘지라고 할 수도 없을 것이고 관리비도 일절 요구하지 않는다는 조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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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지에 올리는 것은  내가 현재 이 나라의 의료 체계를 경험하고 느낀 바를 공유하고 교민들이 앞으로 어떻게 처신해야하는
                                                               가를 연구해야 한다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미력이나마 힘을 보태려는 것이다.아마 많은 호주 교민들이 금전 문제로 개인 의
                                                                료보험을 들고 있지 않은 것으로 아는데 구태여 부담을 느끼면서까지 개인의료보험에 가입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 호주 이
                                                                  민35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절감했고  사랑하는 아내를 떠나 보내며 나이80이 되어서야 뒤늦게 깨달은 이런 느낌을 교
                                                                    민 여러분과 나누고자 함이다. 나 역시 공원 묘지에 쓸쓸히 혼자 누워 있는 아내 곁으로 가서 아내를 위로할 날이
                                                                    그리 멀지 않다라는 말을 끝으로 이 글 을 마치며 흐르는 눈물을 닦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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