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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Education / 교육















                                         클래식에 대하여...


                                                                                                     ↑↑↑↑
                                         조아키노 로시니                                               마이라이프 QR코드

                                                                                              스캔하고 명곡 모음 듣기

            조아키노 안토니오 로시니(이탈리아어: Gioacchino Antonio  작곡되었다 한다. 1813년에 《탄크레디》, 《알제리의 이탈리아  가에 맞춰 작곡되었다. 이들은 모두 전통적인 벨칸토 창법을
            Rossini, 문화어: 죠아끼노 안또니오 로씨니, 1792년 2월 29       여인》 등을 작곡하면서 로시니의 명성은 이탈리아를 벗어나  익힌 성악가들이었으나, 다음 세대의 작곡가들과 성악가들이
            일 ~ 1868년 11월 13일)는 가에타노 도니체티, 빈첸초 벨리니         유럽 대륙으로 퍼져나갔다.                                  벨칸토 창법을 멀리하게 되었기에, 결국 로시니는 오페라 무
            와 더불어 19세기 전반의 이탈리아 오페라 무대를 화려하게                                                               대를 떠나게 되었을 것이라 추측되고 있다.
            장식하며 벨칸토 낭만주의의 빛나는 예술성을 꽃피운 이탈리                1817년에는 《신데렐라 》, 《도둑까치》가, 1818년엔 《이집트의
            아의 작곡가다. 멜로디의 구성에서는 그 누구도 쉽게 비교되               모세 》가, 1819년엔 <호수의 여인>이 쏟아져 나왔다. 그 대부           오페라 작곡을 그만둔 뒤에도 종교음악과 가곡, 실내악곡 등
            기 어려울 정도의 뛰어난 천재성을 선보였다.                       분은 오페라 부파였으나 《호수의 여인》과 《세미라미데》같은  을 틈틈이 썼으며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 성가곡 《스타바트 마
                                                           오페라 세리아도 있었다.                                   테르》가 있다.
            로시니는 이탈리아의 페사로에서 관악기 주자 아버지와 소프
            라노 어머니에게서 태어나, 14세인 1806년에 첫 오페라 《테            1825년의 《랭스 여행》, 1826년의 《코린트의 포위》, 1827년         사교계의  유명인사로  스페인의  거부였던  돈  바렐라(Don
            메트리오와 폴리비오》를 작곡했다.                             의 《모세와 파라오》, 1828년의 《오리 백작》으로 새로운 오             Varela. 17??~1837)는 막대한 액수를 제시하며 로시니에게
                                                           페라를 이어갔던 로시니는 1829년에 《빌헬름 텔 》을 작곡한  이 곡의 작곡을 의뢰했는데 전성기 때만큼 빠른 속도로 작곡
            4년 후인 1810년에 단막의 오페라 부파인 《결혼 보증서》를  후 갑자기 오페라를 그만두었다. 따라서 불과 37세의 나이에  을 할 수 없었던 로시니는 그의 재촉에 동료 작곡가 조반니 타
            완성하여 베니스에서 초연했다. 이 곡의 성공으로 그는 단숨               완성한 《빌헬름 텔 》이 그의 마지막 오페라로 자리하게 되었               돌리니에게 뒷부분의 작곡을 맡겼다.
            에  유명  오페라  작곡가로  등장했다.  이때부터  37세가  되던  다. 이후 그는 37년을 더 살았지만 오페라는 단 한 편도 쓰지
            1829년까지의 20년 동안 그는 수많은 오페라를 무대에 올              않았다.                                            로시니와 타돌리니가 만든 곡은 로시니의 이름으로 발표되었
            렸다.                                                                                            고 발표의 9년 뒤, 그리고 돈 바렐라의 사후 4년 뒤인 1841년
                                                           이처럼 오페라 작곡을 그만두게 된 이유에 대해 로시니오페라  악보의 출판에 앞서 로시니는 타돌리니가 썼던 부분을 다시
            엄청난 다작가였던 로시니는 1812년 한 해 동안 《행복한 착             작곡보다 먹는 일이 더욱 즐겁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농담했는                작곡하여 발표했다.
            각》,  《바빌로니아의  키로스,  또는  벨사자르의  몰락》,  《비단  데, 실제 이유는 자신의 작품을 노래할 성악가가 없었기 때문
            사다리》, 《시금석》, 《도둑의 찬스》 등을 작곡하였다. 24세인  이라 여겨지고 있다. 그의 오페라는 부인 이사벨라 콜브란을  《스타바트 마테르》는 1842년 파리에서 초연되어 엄청난 성공
            1816년에 작곡한 대표작 《세비야의 이발사》는 단 13일 만에  비롯하여, 안드레아 노자리, 조반니 다비드 등대의 주요 성악                         을 거두었고 그 해에만 30여개 도시에서 연주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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