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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Education / 교육







            작곡천재음악가..

                                                                                                                     마이라이프
            카미유 생상스                                                                                               QR코드 스캔하고

                                                                                                                    명곡 듣기 ▲



            1835년, 프랑스 파리에서 관리를 지낸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             한스는 바그너와 함께 이를 옆에서 보고 할 말을 잃었다는 일               상당히 활동하였으며 심지어 오컬트 계열의 학문에다가 자연
            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아버지는 폐결핵으로 사망했고 홀어               화를 전하며 '나도 악보를 보고 연주는 할 수 있지만 나를 비롯             과학까지 일부 발을 담근 음악가였다고 한다.
            머니 밑에서 자라났다고 한다. 아버지의 죽음은 생상스의 일               해 현존하는 어떤 사람도 생상처럼 그렇게 훌륭한 연주는 할 수
            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데, 생상스는 자신도 아버지처럼 폐              없다. 그는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악성이다.'라며 극찬했다              특히 음악학자로서 그는 높게 평가되는데, 후기 낭만시대인 당
            질환으로 죽게 되지 않을까 걱정해서 추위를 싫어하다보니 그               고 전해진다.                                         시에 베토벤 이전 음악을 자세히 연구한 학자였기 때문이다.
            의 평생에서 대부분의 시간은 따뜻한 남쪽 나라를 찾아다니는
            일이었다.                                          허나 이런 재능을 갖고 있음에도 이후의 생상스는 피아노에 대               오르간과  피아노에  능통한  생상스이었지만  작곡가로서는  바
                                                           한 관심을 비교적 접고 오르간에 더욱 매진했다고 전해져 있다.              이올린을 위한 작품도 많이 만들었는데 이렇게 된데에는 당대
            어릴때부터 음악 신동으로 이미 널리 알려지게 되었는데 13살                                                              스페인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 사라사테의 덕이 컸다. 사라사
            의 나이로 파리 음악원에 입학하여 파리 음악원의 오르간 과정              따라서 생상스에 대한 세간의 인식은 작곡가 보단 뛰어난 오르               테에게 자신의 바이올린곡을 헌정했는데 생상스의 작품에 감
            에서 14살 나이에 1위를 차지할 정도였고 16살에 자신의 첫번            가니스트에 맞춰져 있었다. 그래서 생상스의 작품보다는 연주                탄한 사라사테는 이후 귀찮을 정도로 바이올린 협주곡을 청탁
            째 교향곡을 작곡했다고 한다. 특히 피아니스트로서의 재능이  에 집중하는게 일반적이었다. 결혼식에서 신부 입장곡으로 즐                             해 오게 되었다.
            두드러져서 이미 10살의 나이에 데뷔하여 뛰어난 실력을 보여              겨 쓰이는 바그너의 로엔그린 3막의 결혼행진곡을 오르간으로
            주었다고 한다.                                       편곡한 사람이 바로 생상스이었을 정도.                           덕분에 생상스는 바이올린 협주곡을 쓰는 기계가 되었다. 정식으
                                                                                                           로 바이올린 협주곡이란 제목이 붙은 작품은 3곡 뿐이지만 그 밖
            이게 어느 정도였냐면 10곡이 넘는 곡을 연주한 다음에 앵콜을  1857년, 생상스는 프랑스 오르가니스트의 최고봉의 자리라 불                         에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들은 꽤나 많으니 사라사
            자청했는데 베토벤 소나타(32곡)중 어떤 곡이든 쳐보이겠다고  리는 파리의 성 마들렌 성당의 오르가니스트가 되었다. 한편으                           테가 얼마나 생상스를 들볶았을지 상상이 갈 정도다.
            호언할 정도였다 하며, 초견 실력에선 리스트에 비견될 정도의  로는 계속 작곡을 해나갔는데 당대의 평가는 "전위적인 작곡가"
            비범한 천재성을 보여줬다고 한다.                             라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후기낭만 이후 신고전주의 성립에 많은 영향을 끼친 음악가 중
                                                                                                           한 명이기도 하다.
            그 일례로 리스트의 제자 한스 폰 뷜로가 바그너와 만담을 나누             1921년 12월 16일, 알제리에서 86세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고 있을 때 독어를 몰라서 지루해졌던 생상스는 아직 미완성이              사망 후에는 파리의 몽파르나스 묘지에 묻혔다.                       생상스는 오페라 13개, 발레음악 1개, 영화음악 1개, 부수음악
            던 지그프리드(SiegFried)의 악보를 집어들고 피아노로 초견하                                                          6개, 관현악곡 26개, 관악합주곡 4개, 협주곡 35개, 실내악 42
            면서 곡의 포인트 하나, 효과 하나 놓치지 않고 속독으로 읽어             후세에 대한 그의 평가는 다재다능한 천재음악가로, 피아니스                개, 오르간곡 15개, 피아노곡 81개, 합창곡 63개, 가곡 150개 총
            내는 동시에 즉석 편곡했다고 한다.                            트, 오르가니스트, 작곡가, 지휘자, 음악학자, 심리학자로서도  437곡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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