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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Education / 교육







            작곡천재음악가..

                                                                                                                     마이라이프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                                                                                          QR코드 스캔하고

                                                                                                                    명곡 듣기 ▲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서 어려서부터 음악 교육을 받긴  관에 의존해서 작곡하는 스타일이었고 대위법이나 음                                      프를 비롯한 교수진과 수백명의 학생들이 같이 음악원
            했으나 음악에 그리 흥미를 보이지는 않았다. 음악보다                  악이론에 대해 상당히 겉핥기 식으로 알고 있었기에 벅                   을 떠났다. 전국적인 구명운동으로 림스키코르사코프
            는 오히려 문학에 관심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찬 업무였다.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좀 더 음악적 지식에  는 복직되었지만, 말년에 림스키코르사코프는 협심증
                                                           해박했던 차이콥스키의 자문을 구했고, 결국 교육자로                    을 앓았다. 그는 페테르부르크의 마을인 류벤스크에서
            12살에  상트페르부르보숄라테스에  있는  해군  학교에  서 기본기를 다지기 위해 3년의 안식년을 가지고 철저                                 죽었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티흐빈 공동 묘지에
            들어가고,  러시아  해군에  입대해서  장교로  복무하는  히 공부를 다시 하게 된다.                                              묻혔다. 니콜라이의 아들 안드레이 니콜라예비치 림스
            등, 음악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집안에 해군 출신                                                                키코르사코프는 음악학자이고, 조카 게오르기 미하일
            이 많았기에 전통을 따른 것이지만, 그는 해군의 일에  결과적으로 그는 이 3년 간의 독학을 통해 서구 음악  로비치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작곡가이다.
            염증을 느꼈다.                                       양식의 대가가 되었고, 자신의 직함에 맞는 그릇을 갖
                                                           게 되었다. 리아도프, 글라주노프, 레스피기, 스트라빈                  림스키코르사코프는 '러시아 5인조'의 강경한 국민악파
            6살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고 9살에 작곡 공부를 시작했                  스키, 프로코피예프 등 당대를 풍미한 음악가들이 모두  로서 음악적 인생을 시작했지만, 스스로 서구 음악 양식
            다지만, 그가 음악의 길로 접어든 결정적인 계기는 밀리  그의 지도를 거치게 되었고, 그는 러시아 음악사에 있                                  을 열심히 독학하여 이 영향을 융화시켰으며, 이후에 리
            발라키레프와 세자르 큐이, 모데스트 무소륵스키와 만                   어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하르트 바그너의 영향을 받아들여 독자적인 관현악 어
            나게 된 것이었다. 이 때가 그의 나이 18세 때로서, 림스              넘을 수 없는 아성이었던 차이콥스키에 대해 내심 크게  법의 대가로서 발돋움했다.
            키코르사코프는 러시아 5인조 중 가장 어렸다. 이들과                  의식하고 있었는데, 개인적으로 그 둘은 막역한 우정을
            의 교류를 통해 림스키코르사코프는 국민주의 음악을  유지했지만  림스키코르사코프  가문에서는  '차이콥스                                     그의 영향을 받은 음악가들이 오랫동안 러시아 음악계
            일으키는 것을 추구하게 되었고, 러시아 민요와 전설,  키'가 금기어인 것이 오래도록 불문율이 되었다고 한다.                                  에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림스키코르사코프는 큰 음악
            이국적인 분위기를 대거 차용하는 방식을 꾀하게 된다.                                                                  적 유산을 남기게 되었다.
                                                           1887년의 '스페인 기상곡'과 1891년의 모음곡 '세헤라
            림스키코르사코프는 1871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                   자데' 등의 성공으로 그는 당대의 거장으로 각인되었고,  그는 러시아 교회 음악과 민요 등을 베를리오즈식의 화
            원의 관현악법, 작곡법 교수로 임용되었는데, 27세의  현란하고 진보적인 관현악법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다.  성과 명쾌한 관현악법으로 처리하는 형식을 써서 '근
            젊은 아마추어 음악가를 교수로 발탁한 것은 파격적인  그러나 1905년에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정국이 얼어붙                                   대 러시아 음악파'에 큰 영향을 끼쳤다. 주요 작품으로
            조치였다. 아마도 관악기를 많이 사용하는 해군 군악대  자, 그는 자유주의자로서의 소신을 드러내며 학생들에  는 교향 조곡 <천일야화>, 오페라 <사드코> <금계(金
            지휘자로  활동하면서  관현악법에  능숙했기에  교수직  대한 정치적 탄압에 공개적으로 반대하였다. 이에 림스                                  鷄)> <트럼본 콘체르토> 등이 있고, <관현악법 원리>
            제의를 받은 것이겠지만, 림스키코르사코프 자신도 직                   키코르사코프는 해임되었고, 이에 반발하여 글라주노                     <화성학 실습> 등의 음악 이론서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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