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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바르 그리그 마이라이프 QR코드
스캔하고 명곡 모음 듣기
그리그의 가족은 증조부대에 스코틀랜드에서 노르웨이의 베 대로 독일에 머물렀기 때문에 독일의 음악가들과 어울리고 싶 같은 선이 굵은 작곡가는 아니나 섬세한 서정시인적인 음악가
르겐으로 처음 이주하였다. 아버지는 상인이자 베르겐 주재 영 었으나 졸업 후 곧 스칸디나비아로 가서 요한 페테르 에밀리우 였다. 그 때문에 오페라를 결국 한 곡도 완성하지 못하였고, 유
국 부총영사였던 알렉산더 그리그(1806년–1875년)였으며, 어 스 하르트만과 닐스 가데를 알게 되었고 다음 해에는 리카르 일한 교향곡인 교향곡 다단조도 자신이 연주금지곡으로 붙였
머니는 변호사이자 정치가였던 에드바르드 하게루프의 딸인 드 노르로크와도 만나 민족주의적인 음악사상을 품게 되었다. 고 거의 잘 알려지지 않았다. 교향곡 이외의 소나타 형식을 사
게신 주디테 하게루프(1814년–1875년)로 피아니스트이자 음 용한 대작에서도 쉽게 성공했다고는 하기 힘들다. 구성력이나
악강사이기도 했다. 어머니는 매우 뛰어난 피아니스트였으므 1867년 4촌 누이인 가수 니나 하게루프와 결혼하여 귀국, 노르 주제의 논리적인 발전에 약한 면이 있었다.
로 그는 최초의 음악교육을 어머니에게서 받았다. 로크와 협력하여 1869년 오슬로에 음악협회를 설립, 1880년
까지 그 지휘를 맡아 보았으며, 한편으로 민족색이 풍부한 명곡 오직 하나의 예외로는 피아노 협주곡 A단조(1868)으로, 이는
원래 이름은 그레그(Greig)로, 스코트인 씨족중 하나인 그레고 을 차례로 내놓았다. 1880년 이후에는 고향인 베르겐으로 돌 25세경의 젊었을 때의 것이다. 그리그의 특징은 첫째로 생애
어와 관련이 있다. 1746년 스코틀랜드에서 벌어진 컬로덴 전 아와 작곡에 전념하였고 그의 간단한 작업장이 지금도 국립박 의 거의 대부분 시기에 걸쳐 계속해서 작품을 쓰고 있었으므로
투 이후, 애버딘셔 출신의 그리그의 증조부 알렉산더 그레그 물관에 그대로 남아 있다. 가곡을 보면 그의 예술의 발자취를 잘 알 수가 있다. 가곡 다음
(1739년-1803년)는 여러 나라를 돌아다닌 뒤 1770년경에 노 으로는 피아노의 소곡이 중요하며 10권 66곡으로 된 <서정소
르웨이에 정착했다. 이 곳은 피오르라고 하는 빙하로 생긴 골짜기가 강입구로 된 곡집> 등 그 수도 가곡만큼 많다.
해안선 근처까지 뻗어나온 것이 내려다보이는 곳으로서, 숲 사
그리그의 친증조부모 존(1702-1774)과 앤(1704-1784)은 스 이의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다. 그리그는 작곡가이자 피아니스 관현악곡 분야에서도 성공한 것은 피아노의 <서정소곡집> 가
코틀랜드 애버딘셔 래튼에 있는 폐허가 된 세인트 에테르난 교 트로서 또 지휘자로서 몇 차례나 외국에 갔으나 본거지는 늘 운데에서 4곡 정도는 자기가 골라내 오케스트레이션한 <서정
회의 버려진 교회 묘지에 묻혔다. 그리그의 사촌중에는 캐나다 조국이었다. 만년의 약 10년간은 학생 때 앓은 폐병이 재발하 모음곡>(1891)이라든가 입센의 극에 곡을 붙인 <페르 귄트 모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가 있다. 여 어두운 나날을 보내야 했고 64세 때까지 살다 출생지에서 음곡>(1874-1875) 등 소곡의 모음이다.
사망했다. 유골은 작업장 아래에 있는 피오르의 벽면 우묵하게
15세 때 독일에 유학하여 라이프치히 음악원에 입학, 이그나 들어간 곳에 안치되었다. 그의 실내악곡 중에서는 비교적 연주기회가 많은 제3바이올
츠 모셸레스, 카를 라이네케 등에게 음악을 배웠다. 당시 독일 린 소나타(1878)도 실질적으로는 노르웨이의 노래와 춤의 접
에 유학한 스칸디나비아반도 출신 음악가의 거의 대부분은 그 그리그는 동년배인 표트르 차이콥스키, 안토닌 드보르자크와 속곡 같은 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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