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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의 작곡가


            벤저민 브리튼                                                                            QR코드 스캔하고
                                                                                                  마이라이프

                                                                                                 명곡 듣기 ▲



          브리튼은 매우 다채로운 변화에 찬 작품을 썼으므로 그 작                 Ireland)에게 작곡을 배웠다. 이 무렵에는 교향곡, 6개의  일루미네이션》, 《미켈란젤로에 의한 7개의 소네트》, 《진
          풍을 한마디로 요약하기는 어렵지만, 엘리자베스 왕조 이                  현악 4중주곡, 10곡의 피아노 소나타 등의 습작을 작곡하                혼교향곡》, 《현악 4중주곡 제1번》 등 이 시기의 작품들은
          래의 영국음악이나 영국의 민요에 큰 관심을 가졌으며 그  였다는데, 현악합주를 위한 《심플 심포니》는 후에 이들 습                                현재에도 많이 연주된다. 1942년 봄 마침내 제2차 세계
          전통에 입각하여 현대적인 음감각을 나타낸 작곡가로 평                   작을 기초로 새로 쓴 것이다.                                대전 중이던 고향 영국으로 돌아왔으나 양심적 이유에서
          가받는다. 여러 가지 기법에 숙달하고 멜로디에도 뛰어나                                                                  종군을 거부하는 것이 법정에서 인정이 되어 서퍽주에 틀
                                                          음악학교 재학 중에 쇤베르크나 베르크의 12음기법에 흥
          화성, 음빛깔, 리듬감 등의 표현 효과에는 감각적인 날카로                                                                어박혀 창작에 몰두했다. 이 때 《성 체칠리아에의 찬가》, 《
                                                          미를 가지고 빈에서 베르크에게 사사하려고 생각하였으나
          움을 보이고 있으나, 그 작풍은 중용(中庸)을 존중하며 결                                                                캐럴의 제전》,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며 기뻐하라》 등 공
                                                          보수적인 영국에서는 12음음악은 위험사상처럼 간주되어
          코 과도한 일이 없다. 불협화음도 결코 지나침이 없고 멜로                                                                습하의 영국민에게 마음의 평안을 주는 맑은 종교적 작품
                                                          학교 당국도, 옛 스승인 브리지도 한사코 반대했으므로 이
          디도 대체로 조성적(調性的)이어서 친해지기 쉽다는 평을                                                                  을 만들어냈다.
                                                          희망은 실현되지 못했다. 음악학교를 졸업하기 전인 1933
          받는다. 또 화음도 오케스트레이션이 자아내는 특징적인
                                                          년에 아버지가 별세하였기 때문에 자활의 길에 몰린 브리
          음빛깔의 콘트라스트가 그의 개성이다. 《칸타타 아카데미                                                                  전쟁을 부정하는 평화주의자이던 그의 양심으로부터는 미
                                                          튼은 다큐멘터리 영화음악을 작곡하는 일에 종사하였다.
          카》(1960)에서는 12음기법도 사용하고 있으나 《전쟁 레                                                               국에 머무는 동안 브리튼은 지휘자인 세르게이 쿠세비츠
                                                          이는 후년 오페라를 만드는 데 여러모로 유익한 경험이 되
          퀴엠》 이후 그 작풍은 크게 변화하여 더욱 응축한, 간결한                                                                키로부터 경제적 원조를 받아 오페라 작곡을 위촉받았다.
                                                          었을 뿐만 아니라 이 일을 통해 영국 시(詩)단에서 활약하
          표현이 추구되기에 이르렀다. 《마도요의 강》, 《불타는 용                                                                1945년 전쟁이 끝나자 《전쟁 레퀴엠》을 초연했다. 영국의
                                                          고 있는 W. H. 오든과 만난 사실은 브리튼의 예술과 인간
          광로》는 이러한 경향을 보여주었으며, 중세의 기적극을 재                                                                 시인 크래브의 장편시를 바탕으로 한 오페라 《피터 그라임
                                                          에 큰 영향을 주었다. 브리튼은 오든에 의하여 영시(英詩)
          흥하여 거기에 새로운 오페라 형식을 찾으려는 의도에서                                                                   스》는 헨리 퍼셀 이래의 본격적 영국의 오페라라고 하여
                                                          가 지니는 아름다움과 시와 음악의 미학적 관계를 재인식
          주목을 받았다.                                                                                        일약 브리튼의 명성을 높였다. 이 때부터 그는 《루크리시
                                                          하였을 뿐 아니라 예술가의 사회적, 정치적 책임에 대한 자
                                                                                                          아의 능욕》(1946), 《앨버트 헤링》(1947), 《거지 오페라》
          어린 시절                                           각을 갖게 되었다. 오든의 시에 의한 작품도 몇 곡 쓰였다.
                                                                                                          의  자유로운  개편판(1948),  《오페라를  만들자》(1949),
          브리튼은 잉글랜드의 서퍽주에 있는 로스토프트에서 치과  그동안 1937년에 잘츠부르크 음악제에서 《프랭크 브리지
                                                                                                          《빌리 버드》(1951),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을 기념하
          의사인 아버지와 아마추어 가수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                   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이 초연되어 브리튼은 비로소 국제
                                                                                                          는 《글로리아나》(1953), 《나사의 회전》(1945), 기적극(
          어났다. 그는 2세 때 피아노에 관심을 보이며 어린 시절부                적인 주목을 받았다.
                                                                                                          奇蹟劇) 《노아의 홍수》(1958), 《한여름밤의 꿈》(1960), 《
          터 음악적 재능을 드러냈으며, 5세부터 작곡과 피아노와
                                                          음악 활동                                           마도요의 강》(1964), 《구약성서》에서 제재를 딴 《불붙는
          비올라를 배웠다. 5세 때 노래를, 7세 때 피아노곡을, 9세
                                                          1939년 피터 피어즈와 함께 영국을 떠나 친구인 오든이                 용광 로》(1966) 등 거의 매해마다 화제가 되는 무대작품
          때는 최초의 현악 4중주곡을 작곡하였다. 1927년 13세부
                                                          귀화한 북아메리카를 여행하였다. 1942년 봄까지 2년 반                을 발표하였다. 1946년에 잉글리시 오페라 그룹(English
          터 프랭크 브리지(Frank Bridge)에게서 개인 교습으로 음
                                                          에 걸친 미국 체재는 그의 창작활동에 풍요한 결실을 가져                 Opera Group)을 결성했고, 1948년에는 앨더버러 페스
          악 이론과 작곡을 배웠다. 16세 때 장학금을 받아 런던 왕
                                                          다 주었다. 바이올린 협주곡, 아르튀르 랭보의 시에 의한 《               티벌(Aldeburgh Festival)을 창설했다.
          립음악대학(RCM)에서 본 윌리엄스와 존 아일런드(Jo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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