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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Education / 교육





          피아노의 왕, 교향시의 창시자!


          안토닌 드보르자크


                                                                                                          마이라이프
          (Antonin Dvorak)                                                                             QR코드 스캔하고
                                                                                                         명곡 듣기 ▲




          드보르자크는 프라하 근교 넬라호제베스(Nelahozeves)에서  완성되었는데, 1872년(31세)에 완성한 혼성 합창과 관현악을  과 독자의 형식에 의한 피아노 3중주곡 「둠키」(실내악곡)(1891)
          9월 8일 태어났다.                                     위한 「찬가」는 대성공을 거두고, 드디어 독자적인 어법에 의해  가 슬라브적인 색채가 짙은 이 시기의 정점을 쌓고 있다.
          바그너(독일)의  「리엔치」가  초연되어  승리를  얻은  해이기도  인정받게 되었다.
          하다. 아버지는 여인숙 겸 정육점을 경영했으며, 안토닌은 그                                                               신세계 미국으로
          장남으로  4명의  동생과  3명의  누이  동생이  있었다.  집안은  이  대성공은  또  이전부터  사모하고  있었던  알토  가수  안나  1890년(49세)부터  이듬해에  걸쳐서는  슬라브  시대의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아버지는  그에게  가업을  잇게  할  체르마코바와의  결혼까지도  가능케  했다.  이  기회에  극장  마지막을 장식하는 영광의 해로서, 각지로부터 칭호나 훈장의
          계획으로 13세 때부터 리만(Antonin Liemann)에게 독일어를  관현악단의 비올라 주자를 그만두고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  수여가 있었으며 프라하 음악원 교수로도 취임했다. 그러나
          배우게  했다.  그런데  리만은  또  유능한  음악가이기도  해서  취임해 보다 많은 창작 시간을 갖게 되었다. 새생활에 들어간  1892년(51세) 미국 내셔널 음악원의 초청으로 조국을 떠나,
          안토닌도 어느 사이엔가 어학 외에 악기와 음악 이론을 배우고  그의 창작 활동은 매우 왕성해져 간다.                                        음악원장으로 취임해서 새로운 미국 시대에 들어가게 된다.
          작곡을 시도하게 되었으며, 음악가로서 입신하겠다는 결심을                                                                 드보르자크(체코슬로바키아)가 흑인 영가에 주목할 수 있었던
          굳히고 말았다.                                        열린 빛나는 문                                        것도, 이 음악원에서는 인종 차별을 하지 않아 흑인 학생과
                                                          1875년(34세) 오스트리아 정부 장학 자금의 시험을 치렀는데  친하게 사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프라하의 음악수업                                       심사원  브람스(독일)와  한슬릭에게  인정받아  합격,  유럽
          1857년(16세)에 다행히 친척의 경제적 원조도 있어서 프라하에  악단에 빛나는 첫걸음을 내딛었다. 브람스(독일)는 드보르자크                         흑인이나  인디언의  음악과  슬라브  음악과의  멋진  결합은
          나가 오르간 학교에서 엄격한 기초 교육을 받게 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독자적인 슬라브 양식을 높이 평가하고,  도미 후 최초의 작품인 교향곡 제9번 「신세계로부터」(교향곡)
          1859년(18세)  졸업,  얼마  동안은  일정한  직업을  갖지  못한  이후 두 사람은 평생 변치 않는 우정으로 맺어진다.                        (1893)였다. 이 곡은 미국인의 호의에 보답하는 의미도 갖고
          어려운  생활이  계속되지만,  작곡  공부는  게을리하지  않아                                                            있어서  그  초연은  공전의  성공을  거두었으나,  이국에서의
          주로 베토벤(독일)을 연구하면서 실내악과 교향곡의 습작에  결혼 이래 이미 「제5번」까지의 3곡의 교향곡, 「현악 세레나데」                           대성공은  고국에  대한  향수를  더욱더  느끼게도  했다.  현악
          힘쓰고  있었다.  그  무렵  선배  스메타나(체코)는  민족  음악  (1875) 「모라비아 2중창곡」(1876) 등의 민족적 작품을 완성해  4중주곡(실내악곡)  「아메리카」(1893),  「첼로  협주곡  b단조
          운동을 개시, 1862년에는 국민극장의 오페라극장 관현악단이  온  그에게  출판사  짐로크(Simrock)로부터  「슬라브  무곡」  (협주곡)」(1894) 등 흑인의 애수와 보헤미아에의 향수를 담은
          발족됐다.  드보르자크(체코슬로바키아)는  이  관현악단에서  (관현악곡)의  의뢰가  있었다.  이것도  브람스(독일)의  추천에  명작은 이것을 뒷받침하듯이 2년 동안 잇따라 완성되었다.
          비올라 주자로 활동했는데, 스메타나(체코)의 민족 오페라를  의한 것이며 1878년(37세)에 출판된 그 「제1집」은 드보르자크
          연주한 체험은 그의 창작 의욕을 크게 북돋웠다. 또한 자주  (체코슬로바키아)의 이름을 일약 세계에 넓혔다.                                    만년
          접하던 바그너(독일)나 리스트(헝가리)의 음악도 그때까지의                                                                1895년(54세)  그리운  고국에  간신히  돌아온  드보르자크
          창작 태도를 진지하게 반성시키는 것이었다.                         특히  영국에서  호평이었는데  이것이  인연이  되어  1884년을  (체코슬로바키아)는  또다시  프라하  음악원에서  교편을  잡는
                                                          필두로  종종  방영  연주  여행이  행해진다.  이러한  순조로움  한편  창작을  계속했다.  그러나  교향시를  중심으로  하는  이
          「찬가」의 성공과 결혼                                    속에서 장녀를 포함한 세 아기의 잇딴 죽음으로 침통한 그는  기간의 작풍은 바그너(독일)나 리스트(헝가리)풍으로 새로운

          이렇게  오페라에  심취한  드보르자크(체코슬로바키아)는  「스타바트  마테르」(성악곡)(1877)를  작곡했는데,  슬픔을  맛이  없었으며,  마지막  작품이  된  오페라  「알미다」(1903)는
          「알프레드」(1870)를  비롯,  몇  개의  오페라를  썼지만  어느  성모에게서  찾아낸  명작  칸타타로서,  각지에서의  초연은  또다시 실패였다. 이 무렵 자주 몸의 상태가 나쁨을 호소하고

          것이나 실패로 끝나고 만다. 오페라 외에도 「교향곡 제1번」,  어느  것이나  대성공이었다.  오페라는  계속해서  썼으나  그리  있었던 그는 마침내 뇌졸중에 쓰러져 1904년(63세) 5월 1일
          「교향곡 제2번」(1865)과 몇 곡의 현악 4중주곡(실내악곡)이  호평을 받지는 못했으며, 걸작 「교향곡 제8번(교향곡)」(1889)                     프라하의 자택에서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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