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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Education / 교육
헝각리 음악 학자
버르토크 벨러
마이라이프
(Bartok Bela Viktor Janos) QR코드 스캔하고
명곡 듣기 ▲
헝가리의 작곡가, 피아니스트, 음악학자인 버르토크 벨러 (Nagyszentmiklos)는 현재 루마니아의 슨니콜라우 마레 1910년에 버르토크 벨러 주니어를 낳았다. 1911년에
(Bartok Bela). (Sannicolau Mare)이다. 버르토크는 그의 유일한 오페라 《푸른 수염의 성》을 그의
아내 마르터(Marta)에게 헌정하였다. 이를 Hungarian Fine
말년에 미국에서 여생을 보냈기 때문에 미국식으로 '벨라 그는 부다페스트 왕립음악학원에서 음악을 공부했고 코다이 Arts Commission 주최의 콩쿠르에 출품했지만 연주할
바르톡'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지만 본인의 고국인 졸탄을 만나 같이 민요를 수집했다. 이는 그의 음악스타일에 수 없다며 거부했다. 그는 이 오페라를 공연하려 했지만
헝가리식으로 이름을 칭하면 버르토크 벨러(Bartok Bela) 크게 작용했다. 예전의 그는 헝가리 민요에 대해서 프란츠 헝가리 정부는 오페라의 작사자 벌라주 벨러의 정치적 성향
이며 풀네임은 버르토크 벨러 빅토르 야노시(Bartok Bela 리스트의 곡에서 보여지는 것과 같은 집시 멜로디로 때문에 프로그램에서 그의 이름을 지우라는 압력을 주었다.
Viktor Janos)이다. 선배 프란츠 리스트, 후배 리게티 생각했었고 1848년 헝가리 혁명의 영웅 코슈트 러요시 버르토크는 거부했고 결국 오페라는 1918년까지 공연될
죄르지와 더불어 헝가리가 낳은 위대한 음악가이며 (Kossuth Lajos)를 기리기 위한 교향시 《코슈트》에서도 그런 수 없었다. 이후 그는 헝가리 정부와 기관에 반감을 갖게
스트라빈스키, 쇤베르크 등과 더불어 현대음악의 형성에 선율을 사용했었다. 집시 멜로디가 아닌 마자르인 농부들의 되었다. 콩쿠르의 일이 있고 나서 2~3년 정도만 곡을 쓰고 그
크게 기여했던 거장 중 한 명이다. 민요를 접하고 나서 그는 이를 진짜 헝가리 민요라고 후엔 중앙 유럽과 발칸 반도, 터키 일대의 민요를 수집하여
생각하고 민요적인 색채가 드러나도록 그의 작품을 쓰기 정리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민요 수집이
생전에는 작곡가 못지 않게 피아니스트로도 유명했으며 시작했다. 힘들게 되자 그는 다시 작곡을 시작했다. 발레곡 《허수아비
중부 유럽을 비롯한 세계 각지의 민요를 수집해서 연구한 왕자》(1914~6)는 그에게 국제적인 명성을 가져다 주었다.
음악학자이기도 했다. 그의 음악은 낭만주의 후기에 1902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차라투스트라는
태동했던 국민악파 성향을 이어받아서 헝가리를 비롯한 이렇게 말했다》의 부다페스트 초연을 들었을 때 이는 버르토크는 이고리 스트라빈스키와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동유럽의 민속음악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낭만주의를 버르토크의 음악에 큰 영향을 주었다. 영향을 받은 또다른 발레곡 《중국의 이상한 관리》와 두 개의
벗어나 현대음악의 지평을 여는 독창적인 어법을 창시하였기 바이올린 소나타를 썼다. 바이올린 소나타는 그의 작품 중
때문에 음악사적으로 특별히 주목받고 있는 인물이다. 경력 및 결혼 생활 화성적으로나 구조적으로나 가장 복잡한 작품이다. 《중국의
그는 피아니스트로 활동하다가 1907년 왕립음악학원에서 이상한 관리》는 주제 때문에 1926년까지 공연되지 않았다.
한편으로 뛰어난 음악 이론가였으며 자신의 이론을 작곡에 피아노 교수직을 맡으면서 정착하게 되었고 트란실바니아
효과적으로 활용했기 때문에 오늘날 작곡가와 작곡가 일대의 민요를 수집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그의 음악은 1923년 버르토크는 마르터와 이혼하고 그에게 피아노를
지망생들에게 자주 탐구되는 연구 대상이기도 하다. 민요의 영향을 받게 되었고 코다이가 클로드 드뷔시를 배운 파스토리 디터와 재혼하여 다음해인 1924년에 두 번째
또한 민요 등 민족음악을 수집하는데 일평생을 바친 만큼 파리에서 데려오면서 그와도 교류했다. 아들 페테르(Peter)를 낳았다.
음악학자로서의 업적도 빼놓을 수 없기에, 연주자나 작곡가
말고도 음악학, 인류학자 등 여러 인접학문의 학자들에게도 그는 당대의 요하네스 브람스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1924년은 아르놀트 쇤베르크가 12음기법을 완성한 해이기도
매우 관심사인 인물이다. 같은 대편성의 관현악곡들을 써왔지만 그의 피아노 소품은 하다. 버르토크는 이후 곡을 쓰지 않다가 아들에게 피아노를
민요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아마도 민요의 영향을 크게 가르치기 위한 여섯 권 분량의 피아노 연습곡 《미크로코스모
생애 초기 받은 최초의 작품은 현악 사중주 제1번(1908)을 들 수 있을 스》(1926~37)를 썼다. 이는 현재에도 피아노 교재로 쓰이고
버르토크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대(大)헝가리 것이다. 있다. 이후에 쓴 현악 사중주 제6번(1939)는 그가 유럽에서
지역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너지센트미클로시 1909년 치글레르 마르터(Ziegler Marta)와 결혼하여 쓴 마지막 곡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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