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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Education / 교육
20세기 클래식 음악의 최고 거장
아르놀트 쇤베르크
마이라이프
(Arnold Schonberg) QR코드 스캔하고
명곡 듣기 ▲
아르놀트 쇤베르크(독일어: Arnold Schönberg, 1941년 작곡 기법으로 확립하였다. 쇤베르크는 12음 음악에서 모든 형식적 원칙들은 최소 세 세대의 작곡가들에게 계승되었으며,
이후: Arnold Schoenberg, 1874년 9월 13일 ~ 1951년 7 반음계 음들을 체계적으로 연관시키는 방식을 연구했으며, 그의 미학과 음악사적 관점은 테오도어 아도르노와 카를
월 13일)는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귀화한 작곡가, 조합적 6음 음형(combinatorial hexachords)을 활용하는 달하우스 같은 음악학자들에게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현재
음악이론가이자 음악교육가이다. 20세기 클래식 음악에서 한편, 때로는 조성적 요소를 포함하기도 했다. 그의 유산은 아르놀트 쇤베르크 센터에 보관되어 있다.
화성법을 혁신적으로 변화시킨 대표적인 현대음악가 중
한 명이다. 그의 음악에서 핵심적인 요소는 동기를 활용한 쇤베르크는 1926년부터 1933년까지 프로이센 예술 일화
음악적 통일성이며, 발전적 변형(developing variation), 아카데미에서 활동했으나, 나치가 집권하면서 사임하고 쇤베르크는 13 공포증이 있었다. 그의 후기작품인 오페라 《
불협화음의 해방, 음악 공간의 통합과 같은 개념을 망명하였다. 나치는 쇤베르크와 그의 제자들의 음악을 "퇴폐 모세와 아론》의 제목을 옳은 철자법인 "Moses und Aaron"
제창하였다. 쇤베르크는 이처럼 20세기 전반기의 가장 음악"으로 규정하고 금지했다. 이후 미국으로 이주하여 으로 하지 않고 "Moses und Aron"으로 한 것은 철자의
영향력있는 작곡가 중의 하나였으며, 조성음악의 해체에 캘리포니아 대학교 로스앤젤레스(UCLA, 1936~1944)에서 알파벳 개수가 13이 되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기여한 중심인물 중 하나이다. 장조와 단조에 기반한 조성의 가르쳤으며, 현재 UCLA에는 그의 이름을 딴 시설이 있다. 있다. 그는 자신이 13일에 태어났다는 사실을 불길한 징조로
해체는 시기적으로 1906년과 1909년 사이에 이루어졌다. 이 시기 그는 영화 음악을 연구했는데, 이전에 《영화 장면을 생각했다. 심지어 자신이 76세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기까지
쇤베르크는 12음기법을 확립한 장본인 중의 한 명이며, 12 위한 반주음악(1929~1930)》에서 실험적 접근을 보였던 했는데, 76의 자리수 두 개를 합하면 7+6=13이 되기
음기법은 음렬주의 음악으로 발전하여 현대음악에서 많은 것처럼, 독창적인 방식으로 영화 음악에 접근했다. 또한, 때문이었다. 그는 77번째 생일을 보내기 두 달 전에 죽었다.
작곡가들의 음악에 계승되었다. 보다 조성적인 음악을 작곡하며 1939년 《실내 교향곡 2번》
을 완성했다. 생애
쇤베르크의 초기 작품들은 《정화된 밤(1899)》과 같이 아르놀트 쇤베르크는 헝가리 출신 구두공인의 아들로, 9
브람스와 바그너의 요소를 융합한 스타일을 기반으로 하였다. 1941년 미국 시민권을 획득하였고, 같은 해 미국이 제2차 세부터 바이올린을 배우고 독학으로 작곡을 시작했다. 그의
안톤 베베른과 알반 베르크의 스승으로서 제2빈악파의 중심 세계대전에 참전하자, 1942년 《나폴레옹 찬가》를 작곡하여 초기 교육은 오스카 아들러, 다빗 요제프 바흐, 알렉산더
인물이 되었으며, 시각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청기사(Der 파시스트 독재자들을 풍자했다. 이 작품에서는 베토벤의 " 젬린스키에게 받았고, 작곡에 대한 대부분의 지식은 브람스,
Blaue Reiter)》에 글을 기고하는 한편, 무조음악을 작곡하며 운명 동기(fate motif)"와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를 바그너, 말러 등 대가들의 연구를 통해 습득했다. 쇤베르크는
명성을 얻은 동시에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활용하였다. 전후, 빈에서는 그에게 명예 시민권을 부여하며 현악 6중주 《정화된 밤》, 《실내 교향곡 제1번》 등과 같은
귀국을 권유했으나, 그는 건강이 악화된 상태였다. 이 작품을 남겼으며, 12음 기법을 만들어 후에 음렬주의로
쇤베르크는 《현악 사중주 2번(1907–1908)》, 《기대 시기의 심신 상태는 1946년 《현악 삼중주》에 반영되었다. 발전시켰다.
(Erwartung, 1909)》, 《달에 홀린 피에로(1912)》에서 홀로코스트의 참상이 세상에 알려지자, 쇤베르크는 《바르샤
극단적인 감정 표현을 탐구했으며, 자신의 자화상에서 바의 생존자(1947)》를 작곡하여 희생자들을 추모했다. 1951 그의 음악은 초기에 대중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강렬한 시선을 강조하는 특징을 보였다. 또한 《야곱의 년, 이스라엘 음악원과 음악 아카데미는 그를 명예 회장으로 평론가들의 호평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쇤베르크는 그의
사다리(1914년 작곡 시작)》와 《모세와 아론(1923년 작곡 선출했다. 음악이 기존의 음악적 규범을 벗어나야 한다고 믿었고, 그의
시작)》을 작업하던 중, 당시 유럽 사회에서 만연했던 이론은 오늘날까지도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그는 화성
반유대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유대교로 다시 개종했다. 또한, 쇤베르크의 혁신적인 음악은 20세기 클래식 음악에서 가장 이론과 음악 작곡의 기초에 대한 저서를 남기며, 음악 이론
그는 이 시기에 12음주의를 본격적으로 발전시켜 체계적인 영향력 있고 논쟁적인 작품들 중 하나로 평가된다. 그의 분야에서도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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