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6 - :: Mylife Weekly 897 ::
P. 26
MY Education / 교육
영국 르네상스 음악의 거장
에리크 사티
마이라이프
(Erik Satie) QR코드 스캔하고
명곡 듣기 ▲
에리크 알프레드 레슬리 사티(프랑스어: Eric Alfred Leslie 그의 교사들은 그에게서 깊은 인상을 받지는 못했고 1년 후 광고하고 다녔으나 정작 작품은 작곡하지 않았다.
Satie, 1866년 5월 17일~1925년 7월 1일)는 프랑스의 사티에게는 의무적인 입영장이 날아오게 되었다. 그러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이다. 사티는 군생활에 전혀 적응을 못했고 결국 몇 주 안가 탈영을 수잔 발라동과의 사랑
해버리게 된다. 1893년, 사티는 화가이자 그림 모델이었던 수잔 발라동과
1884년 그의 첫 작품에 에리크 사티(프랑스어: Erik Satie) 사랑에 빠지게 된다.
라고 c 대신 k를 사용해 서명함으로써 Erik Satie라는 1887년, 사티는 고향을 떠나 몽마르트르에 세를 들어 살기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시작하고 그 때부터 Patrice Contamine이라는 시인과 그녀와 하룻밤을 보낸 사티는 결혼을 신청했으나
친교를 맺게 된다. 거절당했다. 그러나, 그 후 수잔은 사티가 살고 있던 곳의
작곡 이외에도 사티는 가명을 사용해 다다이즘 전문지 391나 옆 방으로 이사하게 되었고, 사티는 점점 더 그녀에게 깊은
대중문화를 다루는 Vanity Fair 등에 많은 글을 투고하였다. 사티의 첫 작품도 그 당시 그의 아버지에 의해 출판되었고 사랑을 느꼈다.
르 샤트 누아르라는 카바레 카페의 단골이었던 드뷔시 등의
사티는 20세기 파리의 아방가르드 작곡가들 중에서도 예술가들과 어울리게 된다. 사티는 연애 기간 중 종종 흥분에 휩싸여 그녀에 관한 글을
상당히 독특한 인물로 꼽히며, 미니멀리즘이나 부조리극 등 쓰거나 "심신의 평화"를 찾기 위해 《Danses Gothiques》라는
20세기 예술운동의 선구자로도 불린다. 사티의 작품 짐노페디, 오지브, 노시엥 등도 이때 잇달아 작품을 썼고 수잔은 그의 초상화를 그려 그에게 선물하기도
출판되었다. 1890년, 그는 같은 도시에서 좀 더 작은 방을 했다.
노르망디에서 몽마르트 구해 이사를 한다. 그 다음해에는 장미십자단에서 작곡과
에리크 사티는 노르망디 (레지옹) 칼바도스주 옹플뢰르에서 카펠마이스터를 맡게 되고 이때 《Salut Drapeau!》, 《Le Fils 그러나 몇 개월 후 수잔 발라동이 다른 곳으로 이사를
태어나 네 살때 아버지가 파리에서 번역가로 일을 하게 되어 des etoiles》, 《Sonneries de la Rose+Croix》 등의 작품을 가며 그를 떠났을 때 그는 아주 큰 비탄에 잠기게 되었다.
파리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쓰게 된다. 그녀와의 관계는 사티의 생애에 있어서 유일한 연애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몇 년 후, 그의 어머니가 세상을 뜨고 그는 다시 동생 1892년 중반에 즈음하여 그는 자신만의 독특한 음악언어로
콘라드와 함께 옹플뢰르로 돌아가 조부모와 같이 살게 된다.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죽음
그 해 가을, 사티는 펠라당이 이끌고 있었던 장미십자단을 사티는 1925년 7월 1일, 간경변증으로 인해 사망했다. 그는
사티는 고향에서 한 오르가니스트에게 그의 첫 음악 수업을 떠나 그의 친구 드 라뚜(Contamine de Latour)와 함께 아르케이(Arcueil)에 있는 묘지에 묻혀 있으며 아파트 건물
받았다. 1878년, 사티의 조모도 세상을 뜨게 되고 사티와 발레작 유스푸드를 쓰기 시작했고 그의 생각에 공감했던 앞 잔디밭에는 작은 석고 기념물 'Pack Erik Satie'가 놓여져
그의 동생은 다시 파리로 가서 재혼한 아버지와 다시 같이 동료들은 그를 위해 독특한(마치 새로운 비밀종파의 있다.
살게 된다. 팸플릿같은) 홍보 책자를 제작해준다.
에릭 사티를 죽을 때까지 따라다닌 것은 가난과 독신이었다.
1879년에 사티는 파리 음악원에 입학하였으나, 교사들에게서 또한 사티는 바그너의 오페라를 중심으로 한 당시의
재능이 없다는 평을 듣게 된다. 2년 반 동안 고향에 돌아가 낭만주의에 상당히 회의를 느끼고 있었으며, 《Le Batard 그는 평생 '무슈 르 포브' 즉, 가난뱅이 씨'라고 불릴 만큼
있었던 그는 다시 파리 음악원에 재입학하게 되는 데 여전히 de Tristan》이라는 이름의 반-바그너 주의 오페라의 초연을 가난했으며, 단 한번의 연애를 끝으로 독신으로 살았다.
26 www.mylifeweek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