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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Education / 교육
비극과 사랑, 인간 본성을 꿰뚫는
죽음 이후에도 살아있는 목소리,
주세페 베르디
마이라이프
(Giuseppe Verdi) QR코드 스캔하고
명곡 듣기 ▲
주세페 포르투니노 프란체스코 베르디 (Giuseppe 잃은 베르디는 한때 작곡을 그만두기로 결심했으나, 만년과 정치적 활동
Fortunino Francesco Verdi, 1813.10.10 ~ 1901.1.27) 친구들의 격려로 다시 음악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베르디는 1859년 재혼하였고, 1861년부터 1865년까지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작곡가로, 주로 오페라를 작곡했다. 통일 이탈리아 왕국의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전성기와 주요 작품 정치 활동 외에도 종교 음악에도 관심을 두어, **《레퀴엠》**
그는 19세기 이탈리아 오페라의 가장 영향력 있는 작곡가로, 1840년대부터 베르디는 애국적인 성격의 작품을 잇따라 을 작곡했다. 이 작품은 이탈리아의 애국 시인 알레산드로
오늘날까지도 그의 작품은 세계 유수의 오페라 극장에서 발표하며 국민적인 지지를 얻었다. 《롬바르디아인》(1843), 만초니의 죽음을 애도하는 곡으로, 베르디의 최대 걸작
자주 상연된다. 《에르나니》(1844), 《잔 다르크》(1845) 등에서 나타나는 중 하나로 평가된다. **《레퀴엠》**은 그의 음악적 성취의
애국주의적 요소는 당시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의 압박을 받던 집대성으로, 감정의 깊이와 음악적 완성도를 동시에 자랑한다.
생애 이탈리아인들의 독립 의지를 대변했다. 베르디의 작품은 단순한
1813년 10월 10일, 베르디는 이탈리아 에밀리아로마냐 오페라를 넘어서, 이탈리아 민족주의 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평가
주의 파르마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여인숙과 베르디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전통을 완성하고, 성악적
잡화점을 운영하며 가정을 꾸려갔고, 어린 베르디는 그런 그의 진정한 음악적 완성은 1850년대에 이루어졌다. 아름다움과 극적 진실성을 결합한 독자적인 음악적 세계를
환경 속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부터 특별한 천재성을 보인 1851년 발표된 《리골레토》는 베르디의 예술적 전환점을 창조했다. 그의 음악은 민중의 감성을 반영하며, 선율의
것은 아니었지만, 음악적 재능은 시골 마을에서 점차 두각을 의미하며, 이후 발표된 《일 트로바토레》(1853), 《라 단순함과 감동적 힘으로 오랫동안 사랑받았다. 특히 중기
나타내기 시작했다. 트라비아타》(1853), 《돈 카를로스》(1867), 《아이다》 이후의 작품에서는 관현악법의 확장과 더불어 음악적 깊이와
(1871) 등은 그의 오페라 작곡가로서의 완성도를 다양성이 두드러진다. 《운명의 힘》, 《아이다》, 《팔스타프》
18세가 되던 해, 베르디는 밀라노로 떠나 밀라노 음악원 보여주는 대표작들이다. 특히 《리골레토》의 아리아 < 등에서 나타나는 변화는 그의 음악적 성숙을 잘 보여준다.
입학시험을 보았으나 나이와 경험 부족으로 실패하게 된다. 여자의 마음>은 오페라 역사상 가장 유명한 아리아 중
그러나 그는 꿈을 포기하지 않고 개인 교습을 받으며 작곡 하나로 손꼽히며, 베르디의 명성을 한층 더 강화시켰다. 비록 일부에서는 그의 작품이 대중 취향을 의식한 경향이
공부를 계속했다. 있다고 비판하기도 했지만, 그가 만들어낸 불멸의 작품들은
베르디의 오페라는 극적 구성과 선율미에서 독보적인 특징을 오페라 역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베르디의
베르디에게 진정한 기회가 찾아온 것은 1833년 밀라노 보인다. 그는 인간 감정의 복잡함을 음악을 통해 정확하게 오페라는 세기 반이 지나도 여전히 공연되며, 그가 그려낸
악우협회에서 하이든의 오라토리오 <천지창조>를 지휘하게 표현하며, 특히 ‘인간 그 자체’를 그려낸 작품들이 돋보인다. 인간 감정의 표현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되면서부터였다. 그의 역량이 인정받아 오페라 작곡을 《리골레토》, 《라 트라비아타》, 《아이다》는 모두 비극적
의뢰받게 되었고, 1839년 첫 오페라인 《산 보니파치오의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셰익스피어 원작의 《오텔로》**는 베르디는 ‘소리’를 통한 인간의 감정을 표현한 거장이었으며,
백작 오베르토》가 스칼라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이 오페라는 오페라 비극의 정수를 보여준다. 그의 작품은 모차르트나 바그너와 함께 최고의 오페라
다소 미약한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의 이름을 이탈리아 작곡가로 손꼽히게 한다. 1901년 1월 27일, 그는 88세의
오페라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오페라로 완벽히 승화시킨 작곡가는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장례식에는 20만 명 이상이
베르디 외에는 없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유일한 **희극 참석했으며, 그가 남긴 음악은 이탈리아 오페라의 정수로
그러나 가족의 비극과 신작의 실패 등으로 그는 작곡을 오페라인 《팔스타프》**는 오페라 부파(희극 오페라)의 정신을 오늘날까지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잠시 중단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아내와 자녀를 잘 살리며, 고답적인 웃음의 교묘한 음악화가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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