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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Aussie / 인물













                       Cathy Freeman








                                                          캐쉬 프리먼












                                                1997년 아테네와 1999년 세비아에서 세계육상선수
                                                권대회 여자 400m를 2연패한 프리먼은 호주의 간판
                                                스타이자 호주 원주민인 애보리진(aborigin)을 대표하
                                                는 인권운동가. 마침 ‘여성의 올림픽출전 100주년’을
                                                맞아 ‘여성해방의 의미’까지 더해졌다. 점화자 프리먼                            육상 선수 _ 1973 년 2월 16일생
                                                은 단순히 올림픽 개막을 알리는 걸 넘어 이 세상 모
                                                든 불평등과 억압에 항거하는 숭고한 몸짓으로 진한
                                                감동을 안겼다.

                                                유럽인들이 ‘신대륙’으로 부르는 호주는 6만년 전부터            200m(22초25)에서도 호주 신기록을 세웠다.
                                                살아온 토착민 애보리진의 고향이었지만, 1770년 제
                                                임스 쿡 선장에 의해 영국령으로 선포된 뒤 이주민-원            시드니 올림픽에서의 승리
                                                주민간 끊임없는 갈등을 빚어왔다. 백인우월주의 아래             ‘라이벌’ 페레크가 트랙에 복귀했지만 2000년에도 프리먼은 승승장구했다. 하이라이트는 역시
                                                핍박당한 대부분의 애보리진은 교육수준이 낮고 정부              자국에서 열린 시드니올림픽이었다. 열악한 환경에서 생활하는 40만 애보리진들은 올림픽 개
                의 지원 아래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애보리진의 영웅’ 프리먼은 400m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                막 전날까지 시위를 벌였다. 전 세계의 눈길이 쏠린 시점에 본인들이 처한 열악한 실상과 설움
                며 호주의 국민통합에 톡톡히 기여했다.                                                    을 알리겠다는 것.

                토착민 출신 프리먼                                                               애보리진으론 최초의 국가대표가 된 프리먼은 ‘원주민의 영웅’으로 불려왔다. 각종 국제대회에
                호주 토착민인 프리먼은 퀸즐랜드주 매케이의 슬레이드 포인트에서 1973년 태어났다. 본명은 캐서                    출전해 우승할 때마다 호주 국기와 애보리진 깃발을 함께 흔들며 호주의 원주민 차별정책에 항
                린 애스트리드 살로메 피셔(Catherine Astrid Salome Fisher). 5살 때 부모가 이혼한 뒤 새아버지 브    의해 왔기 때문. 원주민 운동가들은 프리먼이 올림픽에 이용당하는 게 아니냐며 대회 보이콧
                루스 바버의 밑에서 육상을 시작했다. 10대 초반에 100m, 200m, 멀리뛰기에 출전하면서 또래들 사               을 요구했다. 그러나 프리먼은 “정치적 이유로 올림픽이 퇴색되는 건 안된다.”고 일축하며 트랙
                이에 이름을 알렸다.                                                              에 나섰다.


                14살이던 1987년부터는 루마니아계 마이크 다닐라 감독 밑에서 체계적인 훈련을 받았다. 이듬해 투                  사실 호주 극우주의자들에게 프리먼은 눈엣가시였다. 1994년 영연방대회 때 우승한 뒤 호주국
                움바에 있는 페어홈 칼리지(고등학교)에 입학할 때는 달리기를 잘해 장학금까지 받았다. 1989년 국내                 기 대신 애보리진 깃발을 들고 달린 게 시초였다. 백인계 호주인들의 엄청난 반발에 시달린 건
                대회에서 프리먼은 100m를 11초67로 달리며 두각을 나타냈다. 다닐라 감독은 시드니에서 열리는 영                 당연했다. 그러나 국제대회에서 선전을 거듭하면서 호주의 아이콘이 됐고, 올림픽 때 프리먼에
                연방대회에 프리먼을 내보내기로 했다. 1990년 뉴질랜드 오클랜드에서 열린 영연방대회에 프리먼은                    게 쏠린 관심은 상상 이상으로 뜨거웠다. 육상 400m 결승과 예선전 티켓은 발매와 동시에 매진
                호주 400m 계주의 일원으로 뽑혔고, 금메달을 땄다. 16살 최연소 금메달리스트, 그것도 원주민 애보                됐고, 암표마저도 일찌감치 씨가 말랐다.
                리진이라 관심은 뜨거웠다.
                                                                                         바람대로 프리먼은 육상 400m 결선에서 마지막 50m를 남기고 폭발적인 스퍼트로 역전우승을
                대회 후 멜버른으로 이사한 프리먼은 피터 포츈 감독에게 코치를 받기 시작했다. 국제대회에도 명함                    차지했다. 기록은 49초13. 프리먼은 애보리진으로선 두 번째 금메달리스트가 됐다. 1996년 애
                을 내밀었다. 불가리아 세계주니어선수권 100m에서 준결승까지 진출했고, 400m에선 5위를 차지했                  틀란타올림픽 때 여자하키 우승팀의 노바 페리스-니본도 애보리진이었지만 개인종목으로는 프
                다. ‘꽤 잘 뛰는 선수’ 정도였던 프리먼은 1994년부터 눈에 띄게 진화했다. 캐나다 빅토리아에서 열린               리먼이 처음이었다. ‘인종청소’를 방불케 할 만큼 학살과 탄압에 시달리던 애보리진에게 프리먼
                영연방대회에서 200m와 400m를 석권했다. 400m계주에서는 은메달을 땄고, 1600m계주에서는 1                은 큰 희망을 안겼다. 성화 점화자로 프리먼을 내세워 애보리진에게 화해와 용서를 바랐던 백인
                위로 들어왔으나 실격 당했다. 이 해에 400m는 50초04로 개인최고기록을 세웠고, 100m(11초24)와             호주인들에게도 뜻 깊은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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