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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어로 ‘주님은 나의 빛(Dominus illuminatio mea)’이라
                                                           는 표어를 갖고 있는 옥스퍼드 대학교는 11세기에 설립된 영
                                                           어권 최초의 대학이자 영국 최초의 대학이다.  지금은 40여
                                                           개의 칼리지로 구성되어 있다. 영국 총리를28명이나 배출했
                                                           고, ‘나니아연대기’ 등을 집필한 유명한 기독교 변증가이자
                                                           교수인 C. S. Lewis 가 있던 곳이기도 하다.


                                                           또한 ‘피의 매리’인 Queen Mary 에 의해 순교한 3명의 대주
                                                           교들을 재판하고 화형에 처한 장소도 방문할 수 있었다. 오
                                                           랜 역사를 자랑하는 옥스퍼드의 여러 칼리지들을 보고 왕
                                                           과 귀족들의 제공으로 영국에서 초창기 가장 많은 귀중한
                                                           책들을 소유하고 있는 도서관을 볼 수 있었고 각 분야별 도
                                                           서관도 볼 수 있었다.


                                                           이 도서관들에는 600만권이 넘는 책들이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이 학교를 졸업한 종교개혁가로는 감리교를 창시한
                                                           존 웨슬리, 위대한 부흥 설교가 존 휫필드, 종교 개혁가이
                                                           자 성경번역가인 윌리엄 틴데일, ‘종교 개혁 운동의 새벽별’
                                                           존 위클리프가 이곳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공부하고 혹은 교
                                                           수를 역임했다.


                                                           또한 에라스무스가 1498년에 옥스퍼드에 와서 강의를 한
                                                           다. 이렇게 영국 종교개혁에 큰 영향을 끼친 옥스퍼드 대학
            에 대적하는 세력들이 많았으며 안전을 위해 교회 건물의                 교는 캠브리지 대학교와 마찬가지로 잉글랜드 종교개혁의                   한 그들을 맞이한 사람은 켄트국 왕인 에델버트(Ethelbert)였
            ground floor 에는 유리창을 두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직          산실과도 같은 곳이라 할 수 있다.                             다. 그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이미 에델버트는 프랑스 파리에
            접 거리에서 복음을 선포했던 고지대 가난한 사람들과 광부                                                                서 주교를 대동하고 온 그리스도인 공주 버타(Bertha)와 결
            들이 살았던 곳을 방문했다.                                이런 장소를 직접 방문하여 그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는                 혼하여 개종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것은 참으로 유의미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의 옥
            John Wesley 는 별도로 감리교단을 만들 생각은 없었다고            스퍼드 대학교는 캠브리지 대학교와 마찬가지로 영국 전역                  에델버트 왕은 켄트국의 수도인 캔터베리에 선교단이 머물
            한다.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에 의해 훗날 감리교가 출발하                에서 볼 수 있는 동성애 지지 깃발들로 가득 차 있었다.                 수 있도록 배려했고 선교 활동도 허락을 받게 되었다. 어거
            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브리스톨은 기도 응답의 상징이                                                                스틴과 선교단은 엄격한 수도 생활과 전도 활동을 수행했다.
            자 고아의 아버지라 불리는 조지 뮐러가 활동했던 곳이기                 영국의 영적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것 같아 마
            도 하다. 또한 성경 번역가이자 프로테스탄트의 지도자였던                음이 매우 씁쓸했다. 또한 지난 역사의 영국의 위대했던 문                이들을 통해 감명을 받은 수많은 사람들이 이들에게 세례를
            윌리엄 틴데일이 태어나고 활동했던 고장이다. 그리고 브리                화 유산을 소중히 이어가는 영국이 영적 유산은 이어가지                  받기를 원하여 국왕인 에델버트를 비롯해 1만명이 세례를 받
            스톨 역시 많은 흑인 노예들을 매매하던 관문이기도 하다.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다. 미래에 대한 소망                게 되었다. 또한 어거스틴과 선교단은 에델버트 왕에게 예수
                                                           이 끊어지고 암울한 역사를 맞이할 것 이라는 생각에 마음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은 자발적인 것이어야 하므로 왕이 강
            브리스톨(Bristol)에서 캔터베리(Canterbury)로              이 무거워진다.                                        제로 명령하지 않도록 부탁을 하기도 했다.


            이어서 탐사팀은 옥스포드로 향했다. 영국의 종교개혁 운                 옥스퍼드를 뒤로 한 탐사팀은 런던으로 입성하게 되었다.                  성공적인 선교사역을 펼친 어거스틴은 AD 597년 잉글랜드
            동은 위대한 신앙의 인물들을 핍박했던 당시 로마 가톨릭의                런던에서 여장을 풀고 그 다음 날 잉글랜드 동남부의 캔터                 대주교로 임명되었고 잉글랜드 최초의 고위성직자로 이름을
            사제와 지배층들이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인재 배출의                 베리로 행하게 되었다. 캔터베리는 앵글로색슨족에 처음으                  올리게 되었다. 어거스틴은 앵글로색슨 기독교 세계의 모교
            통로였던 대학이라는 최전방에서 시작되었다.                        로 복음이 전해진 곳이다. AD 590년 교황에 선출된 그레고              회인 캔터베리에 교회 겸 수도원을 세우게 된다.
                                                           리 1세 교황은 이전에 갖았던 꿈인 브리타니아 선교를 위해
            당시 중세의 사회 환경에서 성경에 접근이 가능했던 신분은                AD 596년 베네딕트 대수도원장인 어거스틴과40명의 선교                이곳이 바로 지금의 영국 성공회의 총본산인 캔터베리 대성
            로마 가톨릭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사제들이었다. 결국 이들                단을 잉글랜드로 파송하게 된다. 이 당시 그레고리 교황은                 당이다. 현재의 캔터베리 대성당은 약 4세기에 걸친 공사로
            이 성경을 통해 발견한 올바른 진리는 학문적인 도구를 통                아직 브리타니아는 선교가 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었다.                 15세기에 완성되었다.
            해 활발하게 증명하기에 이르렀다.                                                                             그 웅장함과 신비함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캔터베리의 역사
                                                           이들은 자발적인 마음으로 선교의 길을 떠난 것이 아니고                  또한 로마 가톨릭과 영국 성공회의 역사 가운데 흥망을 경험
            자신과 같은 길을 걷는 제자들에게 프로테스탄트와 청교도                 교황의 명령에 어쩔 수 없이 그 땅을 향해 나아갔다. 결국                한 곳이기도 하다. 헨리 8세에 의해 로마 가톨릭의 유산을 파
            운동에 대한 성경의 원리를 적극 강론하며 그들을 양육하고                이들은 브리타니아의 7개 독립 국가 중 하나인 켄트국의 새                괴할 때 캔터베리 수도원도 파괴되어 오늘날에는 그 유적지
            보살폈던 곳이 옥스퍼드와 캠브리지 대학교이다.                      넷 섬에 도착하게 된다.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그 땅에 도착               만 남아 있는 형편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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