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2 - :: Mylife Weekly 818 ::
P. 32
MY Education / 교육
클래식에 대하여...
↑↑↑↑
조스캥 데 프레 마이라이프 QR코드
스캔하고 명곡 모음 듣기
조스캥의 초기 생애는 당대의 기록이 별로 없기 때문에 정확 가 사망했을 때 조스캥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한 진혼곡을 스로 복귀한다.
한 것은 알 수 없다. 다만 후대에 큰 관심을 받은 관계로 사후 쓴 것으로 볼 때, 젊은 시절에 일정 기간 오케겜에게 지도를 받
에 작성된 기록은 많이 남아 있는데 각각의 내용이 엇갈리기 았을 가능성은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으로 이 시기에 사보나롤라를 추억하는 분위기의 모테트
때문에 결국 이런저런 추론을 통해 그의 초기 생애를 재구성하 미세레르나 고용주의 이름을 빌린 미사곡 '페라라공 헤르쿨레
고 있다. 일단 연구자들간 의견이 대체로 일치하는 부분은 그 그는 1480년을 전후하여 밀라노로 간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스의 미사(Missa Hercules Dux Ferrariae)와 같은 명작이 탄
가 1450~1455년 사이에 태어났으며 부르고뉴 공국(Dukes of 그가 헝가리 왕국에 잠시 머물렀다는 후대의 기록도 있으나 확 생했다.
Burgundy)의 현재 벨기에 영역 또는 접경지대에 가까운 프랑 실치는 않으며, 다만 1483년 무렵에는 확실히 밀라노의 스포
스 영역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르차(Sforza) 가문의 전속 가수이자 음악가로 재직하고 있었 1504년 페라라에서 프랑스로 돌아온 조스캥은 이후 1521년 사
다. 그는 재직 중에 로마나 파리로 여행을 갔던 것으로 보이며 망할 때까지 현재 벨기에와 프랑스 접경지역의 콩데 쉬 레스코
조스캥은 10대 초반일 때 부친이 사망하자 숙부의 양자가 1489년에는 아예 밀라노를 떠나 로마로 건너간다. 에 살았으며 노트르담 대학 부속교회의 감독으로 재직하면서
되었다. 이 때 조스캥의 성(姓)은 숙부의 성인 Lebloitte dit 역작들을 많이 창작하였다. 말년이 될수록 그의 명성은 점점 높
Desprez를 따르게 되었는데, 현재에는 별명에 해당되는 데 프 한편 조스캥은 밀라노를 떠나던 시기에 유명한 프로톨라 아졌으며 1509년에는 셍 퀭탱 대학(Saint Quentin collegiate)
레(des Prez)가 압도적으로 유명하지만 조스캥이 활동할 당 (frottola, 설명은 후술)인 《엘 그릴로(El grillo, 귀뚜라미)》와 부속교회의 감독/합창단장직을 겸임하였다.
시에는 르블로와트(Lebloitt)를 성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고 《주여, 당신에게 희망을 걸겠습니다(In te Domine speravi)
있다. 》를 남겼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것 같으며 사망하기 직전 유언으
로 부르고뉴 공령에 속한 콩데 시가 아니라 프랑스 왕국에 재
한편 후대의 기록에 의하면 그가 10살경부터 지역 성당의 소년 이처럼 조스캥은 프랑스 파리 궁정음악가로 재직하던 중 1503 산을 기증했다고 한다.
합창단으로 활동했으며 한편으로 요하네스 오케겜(johannes 년에 이탈리아의 페라라(Ferrara) 공 에르콜 1세(Ercole I,
ockeghem)에게 작곡법을 배웠다고 하는데 확실한 근거는 없 Duchy of Ferrara)의 러브콜을 받고 페라라로 가게 된다. 하 대신 그는 콩데 시에 모테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Pater
다. 지만 페라라로 이주하자마자 흑사병이 유행하는 바람에 페라 noster, qui es in celis, 주님의 기도의 첫 문장)'를 기증하였다
라공과 가족들은 다른 지역으로 피신해 버렸으며, 조스캥도 주 고 하며, 이 주님의 기도 모테트는 그의 마지막 작품으로 추정
다만 조스캥이 평생 오케겜을 스승으로 존경했으며 1497년 그 인의 부재와 흑사병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이듬해 다시 프랑 되고 있다.
32 www.mylifeweek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