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2 - :: Mylife Weekly 825 ::
P. 32

MY Education / 교육







            고전주의 시대의

                                                                                             마이라이프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루크                                                                 QR코드 스캔하고

                                                                                             명곡 듣기 ▲



            글루크의 아버지는 체코 보헤미아의 여러 지방에서 귀                   페라 한 곡을 상연하고, 이 기회에 밍고티의 오페라 순                  었으나 결국 글루크의 실력이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그
            족의  삼림관(森林官)으로  근무했던  사람으로,  따라서  회공연단에  참가하여  유럽  각지를  순회  연주하였다.  후 파리를 떠나 빈으로 돌아와서 은퇴와 다름없는 생활
            그의 소년시절은 식구들과 함께 여기저기로 거처를 옮                   1750년(36세) 빈의 거상(巨商) 딸인 마리안네와 결혼                을 하다가, 1787년 빈에서 73세의 일생을 마쳤다.
            기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17세경, 아버지의 반대를 뿌리                하였는데, 두 사람은 일생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였다.
            치고 집을 나와 프라하로 가서, 프라하 대학의 철학과에                                                                 글루크의 가극개혁
            적을 둠과 동시에 음악활동도 시작하였다.                         1752년부터는 빈을 중심으로 활약하여 그 무렵부터 프                  1769년에 빈에서 출판된 <알체스테>의 악보에는 글루
                                                           랑스 오페라 코미크의 영향을 받은 작품을 남겼다.                     크 오페라에 대한 새로운 이상이 명백히 기록되어 있
            1736년,  빈에서  로브코비츠공(公)의  실내악  연주자                                                              다. 여기서 그는 "시는 음악표현의 기초가 되며 음악은
            가  되어  그  곳에서  이탈리아  오페라를  많이  들을  기           1761년부터는  대본작가  칼차비지(Ranieri  Calzabigi)        시에 종속한다.
            회를  얻었으며,  또한  다음해  이탈리아에서  교회음악  와  협력하여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알체스테
            및  전고전파의  기악작곡가로서  유명했던  삼마르티니                 (Alceste)> 등을 작곡하였으나 이탈리아의 오페라 부                아리아와 레치타티보의 구분이 없어야 한다. 가수의 기
            (G.B.Samartini, 1700-1775)에게서 가르침을 받아 최        파의 인기에 눌려 별로 호평을 받지 못하였다.                       교 과시나 필요 이상의 음악적 장식을 가능한 한 배제
            초의 오페라 <아르타세르세(Artaserse)>를 발표한 이                                                              하여 단순한 기법을 쓴다. 악기는 막의 상황에 따라 알
            후 이탈리아 오페라 작곡에 의욕을 갖게 되었다.                     오페라 작곡가로서의 글루크의 최후 무대는 파리였다.  맞게 선택되어야 한다.
                                                           1772년, 프랑스 대사의 권고에 의해 프랑스 오페라를
            그  후  글루크의  오페라는  평판이  좋아져,  밀라노,  베           작곡할 것을 결심하고, 1774년 <타우리스의 이피게네                  서곡을 극 전체의 분위기와 밀접하게 관계지어야 한다.
            네치아, 크레마, 토리노 등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에서  이아>가 파리에서 대성공을 거두고 프랑스 오페라풍                                     합창, 춤, 무대장면, 무대효과 등은 극적인 명확함을 위
            1744년(30세)까지 오페라 8곡, 파스팃쵸 2곡을 계속  으로 제작한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등이 그 뒤를  해 통일성을 갖게 해야 한다." 등을 강조하고 있다.
            발표하였다. 1746년, 런던으로 가서 오페라 2곡을 작곡               이었다.
            하였으나, 공교롭게도 영국에 내란이 일어났기 때문에                                                                   글루크는 이처럼 이탈리아 오페라, 프랑스 오페라, 독일
            어느 곡도 평판을 얻지 못하였다.                             당시 파리 오페라계에는 글루크를 미는 프랑스파와 피                    오페라 등이 지니는 각 양식을 융합하여, 가수에 편중하
                                                           치니의 이탈리아파 사이에 대논쟁이 일어나 두 사람은  는 오페라에서 '음악을 대본에 봉사케 하는 오페라'로의
            다음해 독일에 가서 드레스덴 근교의 비르니츠에서 오                   <타우리스의 이피게네이아>를 작곡하여 실력을 겨루                     개혁을 이룩하였다.



































              32 www.mylifeweekly.com
   27   28   29   30   31   32   33   34   35   36   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