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2 - :: Mylife Weekly 843 ::
P. 32

MY Education / 교육






          오스트리아의 낭만파 작곡가




                                                                                                        마이라이프
          휴고 볼프 (Hugo Wolf)                                                                          QR코드 스캔하고

                                                                                                       명곡 듣기 ▲



          후고 볼프(Hugo Wolf, 1860년 3월 13일 - 1903년 2         3개월만에  면직되어,  1884~87년에  빈의  신문  《              피아노는 노래에서 자유롭게 표현하고 있다. 볼프는 시가
          월 22일)는 오스트리아의 작곡가이다. 후기 낭만파의 가장  살론블라트》의 음악 비평란을 맡아서 브람스를 공격하고,  지닌 특성을 잘 이해해서 그것을 음악에 표현하였다.
          비중있는 가곡 작곡가중 하나이다                               바그너와  브루크너를  옹호했다.  이  무렵부터  가곡과  시의  의미,  낭송의  중요성,  시구의  의미는  섬세하고
                                                          그밖의  작품을  잇달아  작곡했으나,  바그너에게  너무  충실하게  음악에  표현되어  있다.  그의  가곡은  독일어
                                                          도취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반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몇  가사와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외국인이
          생애                                              사람의 친한 친구들에게만 인정받는 처지를 겪었다.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휴고 볼프는 슈베르트의 흐름을 계승한 오스트리아 최대의
          가곡 작곡가의 한 사람으로서 파란 많은 일생을 보냈다.                  낭만파의  가곡에  극적인  생명을  둔  날카로운  감각의  주요 작품
                                                          세계를  개척해  갔으나,  1890년  심한  신경  쇠약  때문에  500곡 가량의 가곡 중에서, 《뫼리케 가곡집》중의 《봄이
          1875~77년간  빈  음악원에  다녔으나  선생과  다투고  잠시 창작을 중지했다가, 회복한 후 가곡이나 가극 《시장》  왔네》, 《휴식》, 《정원사》, 《잠자는 어린 예수》, 《와이라의
          퇴교처분을  당한  뒤  생활고와  싸우면서  독학으로  등을 작곡하거나 여행을 하였다.                                               노래》.
          작곡가로서의 기반을 닦았다.
                                                          1897년  정신병원에  입원했다가  얼마  뒤  퇴원했으나,  《아이헨도르프 가곡집》 중의 《세레나데》.
          1881년  잘츠부르크로  전출하여  한때  그곳의  부악장(              이듬해  가을에  갑자기  발광을  일으켜  호수에  투신하여
          副樂長)을 지낸 이외에는 빈에 눌러 살며 《살롱신문》에  빈의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거의  폐인으로  지내다  5년  《괴테 가곡집》 중의 《아나크레온의 무덤》, 그리고 《스페인
          음악평론을 써 비평가도 겸했었으나 브람스를 공격한 글  후에 세상을 떠났다.                                                      가곡집》, 《이탈리아 가곡집》 등이 있다.
          탓으로 많은 적을 만들었다.
                                                          그의 가곡은 약 500여곡이나 있는데, 바그너의 영향을받고  이밖에  교향시  《펜테질레아》,  현악  합주용  《이탈리아의
          1897년  진행성  마비증(進行性麻痺症)에  걸려  한  번은  있기는  하나  매우  독창적이며,  심각하면서도  예민한  세레나데》, 가극    《시장(市長)》, 합창곡 등.
          퇴원했지만,  발광하여  자살미수의  발작이  있은  뒤로는  감성을  지녔다.  대부분의  가곡은  시를  가장  충실하게
          엄중한  감시  아래  정신병원에  수감되어  여기서  42년의  음악화하였으며, 제재로 다룬 시는 다방면에 걸치고 있다.                            볼프의 묘
          생애를 마쳤던 것이다.                                                                                    Zentralfriedhof, Wien. 그의 유해는 위대한 음악가들이
                                                          음악적 특성                                          모여 있는 명예묘(名譽廟)지구에 묻혔다.
          어릴 때부터 음악 애호가인 피혁상을 하는 부친으로부터  볼프는  낭만주의  음악에서  최후의  가곡작가라고  할  수
          피아노를 배우고, 그 후 15세 때 빈 음악원에 입학했으나  있다. 볼프 이후의 리트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가곡을  베토벤의  묘하고는  등을  맞대고  있고,  슈베르트와
          학과 성적이 나빠서 2 년 후 퇴학당하고, 부친이 파산하여  제외하고는 그리 애창되지 않고 있다.                                          브람스하고도 가깝다.
          빈곤속에 독학했다.
                                                          볼프의  가곡은  근대의  성격을  지니며  리하르트  Edmund hellmer가 묘지를 조각했다.
          바하, 베토벤, 바그너를 존경했고, 특히 바그너의 작품에  바그너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아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깊이 공명하고, 또 문학을 애독하며 가곡도 몇 곡 썼다.                 전개된 풍부하고 고운 화성이나 복잡한 조바꿈의 기법도
                                                          사용하였다.
          20세로  잘츠부르크의  극장의  부지휘자로  근무했으나





































          32 www.mylifeweekly.com
   27   28   29   30   31   32   33   34   35   36   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