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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Education / 교육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


          니콜로 파가니니


                                                                                                          마이라이프
                                        (Niccolo Paganini)                                             QR코드 스캔하고
                                                                                                         명곡 듣기 ▲


          일명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로 불린 인물로, 19세기 최고의  연주회와 교습으로 젊은 나이에 명성과 부를 거머쥐었다.  파가니니의  이름을  팔아  상점마다  “파가니니  스타일”
          바이올리니스트로 군림했던 이탈리아의 바이올린, 비올라,  그러나  너무  빠른  성공에  도취된  파가니니는  방탕과  이라는 양복·모자·장갑·구두 등이 범람하였다.
          클래식 기타 연주자이자 작곡가, 지휘자이다.                        도박에  빠져들었으며  결국  건강을  해치고  거액의  빚을
                                                          지게  되었다.  이  때문에  자신이  아끼던  명품  바이올린  베를리오즈와 만날 무렵부터 파가니니는 건강이 악화돼서
          역사상  최고로  꼽히는  바이올리니스트이자  19세기  과르네리까지 팔아야 했다.                                                  연주 활동이 뜸해졌으며 1836년 프랑스 파리에서 카지노
          바이올리니스트의  상징이며,  낭만주의를  예고했으며                                                                   사업을 펼쳤다가 쫄딱 망해버리고 만다.
          비르투오소의 시대를 연 최초의 연주가다.                          이후 1801년부터 1804년까지 한 귀부인과 토스카나에
                                                          있는 그녀의 성에서 동거를 했는데, 이 기간 동안 연주회도  생고생을 하다가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고 1839년
          몇몇  경우에  따라서는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사이  신  열지 않고 사람들과 만나지도 않았기 때문에 애인 살해죄로  성탄절에  파리를  떠났는데,  마르세유를  떠나  사르데냐-
          고전주의  시대에  활동했다고  보기도  하며,  또는  초기  투옥되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피에몬테  왕국의  니차에  이르렀을  때  몸이  급격히
          낭만주의 시대에 활동했다고 보기도 한다.                                                                          쇠약해진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 기간에 건강을 회복하면서 하모닉스나
          파가니니는 음악의 낭만주의 시대를 연 선구자격 인물임에  중음주법,  스타카토  등의  새로운  바이올린  주법을  니스의  주교가  ‘마지막  성찬’에  초대했지만,  파가니니는
          분명하며, 후대 대표 낭만주의 작곡가들인 프란츠 리스트,  연구하고 있었다.                                                      고사했고 얼마 뒤 1840년 5월 27일 인후 결핵으로 인한
          로베르트  슈만,  요하네스  브람스,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내출혈로 피를 토하며 외아들 아킬레 파가니니 (1825년 ~
          등도 파가니니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았다.                         1804년  22세  때  출생지  제노바로  돌아와  다음해부터  1895년)의 곁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향년 57세.
                                                          다시 연주활동을 개시하여 이전보다 더한 칭송을 받았다.
          또한 상상을 초월하는 재능과 작품, 그에 반비례하는 수준의  그 명성으로 인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누이동생 엘리자  주요 작품
          막장 인생 때문에 이른바 악마의 재능의 원조로 꼽힌다.                  보나파르트에게 초대되어 보케리니의 출생지 루카의 궁정  바이올린 소나타, 바이올린 협주곡 1~6번
                                                          가극장에서 3년간의 지휘 생활을 보냈다.                          바이올린 협주곡 1번(파가니니)
          생애                                                                                              바이올린 협주곡 2번 라 캄파넬라
          제노바  공화국의  제노바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  1808년(26세)때부터 1828년(46세)까지 20년간에 걸쳐  Op. 1, MS 25, 24개의 카프리스(caprice) 1~24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몇개월만에  스승을  밀라노, 로마, 피렌체, 베네치아 등 이탈리아 각지로 연주  MS 19, 레스트레게(Le Streghe) - 발레음악을 모티브로
          능가하는 천재적인 재능으로 유명해졌다.                           여행을  하였으며  종전의  바이올린  개념을  훨씬  초월한  한 변주곡
                                                          천재적 재능을 뽐내며 청중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MS  23,  모세환상곡  -  정확히는  로시니  오페라
          바이올린  외에도  5세  때부터  만돌린을,  10대  때부터는                                                            모세의  아리아에  의한  G선상의  변주곡이다.  줄여서
          기타도  배웠다고  한다.  파가니니의  재능을  눈치챈  그의  그 명성은 이탈리아 이외의 각지로 퍼져나가 파가니니의  모세환상곡으로 불리며, G현만으로 연주했다는 곡이 바로
          아버지는  베토벤의  아버지처럼  아들에게  하루에  10                이름은 온 유럽 음악 애호가들의 입에 존경하는 마음으로  이 곡이다.
          시간씩 혹독한 연습을 시켰다.                                오르내리게 되었다.                                      MS 59, 베니스의 카니발 - 변주곡의 형태이다. 영화에서
                                                                                                          연주하다가 현이 3개 끊어진 곡이 바로 이 곡.
          1799년  17세의  나이에  이미  북이탈리아  지방에서  1828년 파가니니는 처음으로 국외 연주 여행을 하였다.  MS 84, 기타를 위한 37개의 소나타
          바이올린의  거장으로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으며  3월 말 빈에서 있었던 연주회는 미증유의 대성공을 거둬,  MS 109, 바이올린과 기타를 위한 칸타빌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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