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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Education / 교육





          교향곡의 아버지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


                                                                                                          마이라이프
          (Franz Joseph Haydn)                                                                         QR코드 스캔하고
                                                                                                         명곡 듣기 ▲




          교향곡의 아버지라는 별명이 있는데 하이든은 살아  결혼하는데,  그는  평생  연상의  아내에게서  가정의  모차르트의  디베르티멘토  F장조  ‘음악의  농담(Ein
          있을 때 104곡이나 되는 교향곡을 남겼고 그는 이  행복을 전혀 느끼지 못하게 된다.                                                Musikalischer Spaß, KV 522)’에 필적하는 그 시대
          전까지  명확하게  확립하지  못했던  교향곡  형식과                                                                  초절개그인데  마지막  악장인  6악장에서  현악기의
          악장 개수, 각 악장의 성격과 구성 등에 대한 기준을  1761년(29세)  아이젠슈타트(Eisenstadt)  성주인  조율을 다시 하라고 지시를 내리고 있다.
          세웠다. 예를 들어 1악장은 빠른 소나타 형식, 2악장은  예술의  열렬한  옹호자  파울  안톤  에스테르하지
          서정적인  느리게,  3악장은  빠른  춤곡  형식이고,  4              후작의  관현악단  부악장에  임명되었다.  새로운  1770년대 후반에는 고용주의 허락 없이 자작곡을
          악장은  매우  빠른  론도·소나타  형식이라는  양식을  활동기에  들어간  하이든(오스트리아)은  교향곡을  출판할  수  있게  되었고,  직무에  지장을  주지  않는
          정립하였다.  그의  기여는  오스트리아  음악의  발전  비롯한 많은 작품들을 여기서 작곡하였다.                                         선에서  외부  출장도  가능해졌다.  이때를  전후해
          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하이든의  수많은  악보들이  여러  음악출판사에서
                                                          창작 성향                                           출판되었고, 에스테르하지 가문에 묶여 있던 명성을
          출생 배경                                           오랫동안  귀족  집안의  전속  작곡가로  일한  덕에  유럽 각지에 퍼뜨리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 저작권
          3월 31일 오스트리아의 동쪽 로라우(Rohrau)에서  특별한  삶의  굴곡이  없어  작품에  큰  기복은  없고,  개념은 지금과 달리 상당히 애매했고, 몇몇 악보들은
          태어났다. 프랑스의 작가 보마르셰(Beaumarchais,  꾸준한  자기  발전을  보여주는  것이  일반적인  작곡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첨삭  혹은  편곡되거나
          1732~1799)와  같은  해의  태생으로,  이  무렵  모습이다.  초기에는  바로크  음악의  강한  영향을  하이든의 이름을 사칭한 짝퉁까지 나돌기도 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1세는 절대주의를 확립했다.  받았고,  바흐나  헨델  등의  독일계  거장  대선배들
                                                          뿐 아니라, 코렐리나 비발디 등 이탈리아 선배들의  후기에  속하는  1790년대에는  런던  등  유럽

          아버지는  음악을  좋아하는  마차  수리공이며,  영향도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가령  교향곡  제                                 각지를  여행하면서  자신의  명성과  작풍을  완전히
          하이든은 누나 한 명을 포함한 12형제의 장남으로  6~8번  연작의  경우,  이탈리아에서  유래한  합주  확고하게 굳히는 시기였는데, 특히 자신의 임지였던
          태어났다.  6세  때  음악의  재능을  인정받고  수양  협주곡(Concerto grosso) 양식을 적극 도입해 여러  아이젠슈타트 근처에서 쉽게 접할 수 있던 헝가리나
          아저씨 프랑크의 집에 맡겨져 교육을 받게 된다.                      악기들이 솔로 역할을 부여받고 있다.                            크로아티아,  체코  등  합스부르크  제국에  속했던
                                                                                                          동유럽계  민속  음악이나  집시  음악의  영향이
          빈의 방랑 생활                                        하지만 1760년대 후반부터 1770년대 초반까지는  반영되어 있다. 작품의 구조와 규모도 더 방대해졌고,
          1740년(8세) 빈의 성 슈테판(Stephen) 교회 합창  판할이나  디터스도르프  같은  동시대  작곡가들이  말년의  두  걸작  오라토리오인  ‘천지창조’와  ‘사계’
          단에 채용되어 소년 소프라노로서의 탁월한 기량을  크게  유행시킨  ‘질풍노도(Sturm  und  Drang)’  에서 정점에 달했다.
          보였으나 1749년(17세) 변성 때문에 그만두게 되어,  양식에  영향을  받았고,  이  시기에  단조로  된
          이후는 어려운 방랑생활에 들어갔다.                             교향곡이나 현악 4중주가 꽤 많이 나왔다. 질풍노도  고전적 기악 형식의 완성
                                                          시기를  지난  뒤에는  고용주였던  에스테르하지  그의 가장 큰 공적은 소나타 형식에 바탕을 둔 고전파
          1759년(27세)에  겨우  보헤미아의  모르친(Morzin)  집안의  주문으로  많은  오페라와  극음악을  썼는데,  기악  양식의  완성에  있다.  그의  음악은  고전적인
          백작의 음악대 악장으로 취임하여 이 해에 교향곡 「                    다른  장르의  작품들에도  이러한  주문  폭주가  양식미가  뚜렷하고  정갈한  음악이라,  처음  들으면,
          제1번」을 완성한다.                                     반영되어  다소  가볍고  해학적인  곡들이  많이  다소  심심하게  느껴질  수  있으나  들으면  들을수록
          이듬해에는  빈의  가발사의  딸  마리아(Maria)와  나왔다. 그 절정에 있는 작품이 교향곡 제60번으로,  편안한 가운데 깊이를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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