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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낭만파의 마지막 대표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마이라이프
          (Richard Strauss)                                                                            QR코드 스캔하고
                                                                                                         명곡 듣기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 1864년 6월 11일 ~  아버지에게 진리였던 로베르트 슈만이나 펠릭스 멘델스존의  진 불》(1901)는 치명적인 실패였다.
          1949년 9월 8일)는 독일의 작곡가이자 지휘자이다. 바그너  양식을  띠었다.  그의  호른  협주곡  제1번(1882–1883)                      1905년에  그는  오스카  와일드의  연극에  기초한  《살로메》
          이후 독일의 가장 뛰어난 작곡가의 한 사람이다. 독일 후기  은  이  시기를  대표하는  곡으로  현재에도  자주  연주된다.  를 만들어 냈고, 반응은 교향시《돈 후안》때처럼 열정적이고
          낭만파의 마지막을 대표하는 대작곡가로 손꼽힌다.                      슈트라우스의 양식은, 리하르트 바그너의 조카딸 중 한 명의  극단적이었다.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공연이
                                                          남편이었던 알렉산더 리터를 만나고부터 바뀌기 시작했다.                  이루어졌을  때,  대중의  강력한  항의에  공연은  단  한  번만
          어린 시절                                                                                           이루어진 후 끝나 버렸다.
          그는 1864년 6월 11일, 당시 바이에른 왕국의 뮌헨에서, 뮌헨  슈트라우스로  하여금  그의  젊은  시절의  보수적인  양식을
          왕립  오페라의  수석  호른  주자였던  프란츠  슈트라우스의  버리고 교향시를 쓰도록 설득했던 것이 리터였다. 그는 또한  의심할 여지가 없이, 이런 상황의 상당수는 주제의 문제에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의 아버지로부터 완벽하지만  슈트라우스에게  리하르트  바그너의  수필과  쇼펜하우어의  의한  것이었지만,  부정적  반응의  일부는  그  당시  오페라
          보수적인 음악 교육을 받았다.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나 4                철학을  소개했다.  슈트라우스는  리터의  오페라  중  하나를  하우스에서는 거의 들을 수 없었던 슈트라우스의 불협화음
          세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고 6세 때 작곡을 하였다.                    지휘하게 되었고, 나중에 리터는 슈트라우스의 작품인 《죽음과  사용에 있었다. 그럼에도 오페라는 크게 성공했고, 리하르트
                                                          정화》에 기초한 시를 썼다.                                 슈트라우스는 이 오페라에서 벌어들인 수입만으로 가르미슈
          소년  시절에  뮌헨  왕립  오케스트라의  리허설에  참석할  수                                                           파르텐키르헨의 그의 집을 마련하는 데에 돈을 댈 수 있었다.
          있는 좋은 행운을 잡았고, 또한 그곳의 보조 지휘자로부터  말년
          음악 이론과 관현악법에 대한 개인 교습을 받았다.                     1948년에  슈트라우스는  그의  마지막  작품인  소프라노와  슈트라우스의 다음 오페라는 《엘렉트라》였는데, 불협화음을
                                                          관현악을 위한 《네 개의 마지막 노래》를 썼다.                      한층 더 많이 사용했다. 이 곡은 슈트라우스가 시인 후고 폰
          1874년에 슈트라우스는 처음으로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                                                                호프만스탈과 협력한 첫 오페라였다. 이 두 명은 수많은 다른
          린》, 《탄호이저》, 그리고 《지크프리트》를 들었다. 바그너의  그의 생애 전반에 걸쳐 가곡을 썼지만, 이것들이 아마도 가장  경우에도 같이 일했다.
          음악이  슈트라우스의  음악  양식에  준  영향은  깊었지만,  잘  알려진  곡일  것이다.  그보다  젊은  작곡가들의  작품과
          처음에 그의 아버지는 그가 바그너의 음악을 공부하는 것을  비교했을  때에  슈트라우스의  화성적,  선율적  언어는  이  하지만  이후의  작품에서,  슈트라우스는  그의  화성  언어를
          금했다.                                            시대에 비해 조금 뒤처진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간  순화시켰고,  그  결과물이었던  《장미의  기사》는  큰
          그가 《트리스탄과 이졸데》 악보를 얻은 것은 16세 때였다.  그의 곡은 항상 청중과 연주자에게 인기가 있었다.                                  대중적 성공을 거뒀다. 슈트라우스는 1940년까지 주기적인
          사실,  슈트라우스  집안에서  리하르트  바그너의  음악은                                                               간격으로 오페라를 계속 만들어 나갔다.
          열등한 것으로 취급되었고 말년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슈트라우스는 1949년 9월 8일에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에서
          이것을 깊게 후회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85세로 세상을 떠났다. 슈트라우스의 유해는 화장되었다.                 그 가운데에는 《낙소스의 아리아드네》(1912), 《그림자 없는
                                                          항아리는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Garmisch-Partenkirchen)         여인》(1918),  《간주곡》(1923),  《이집트의  헬레나》(1927),
          1882년에  그는  뮌헨  대학교에  입학하여  철학과  예술사를  에 있는 가르미슈 묘지에 묻혀 있다.                                     《아라벨라》(1932)  (이상  모두  호프만스탈과의  협력에
          배웠지만  일년  후에  베를린으로  떠났다.  거기에서  그는                                                             의함), 《말 없는 여인》(1934) (대본작가 슈테판 츠바이크의
          자리를 얻기 전에 보조 지휘자로서 한스 폰 뷜로에게서 잠깐  오페라, 무대 작품                                                    대본), 《평화의 날》(1936) 과 《다프네》(요제프 그레고르와
          배우고,  뷜로가  1885년에  은퇴했을  때에  뮌헨에서  그의  19세기의 끝 무렵에, 슈트라우스는 오페라로 관심을 돌렸다.  츠바이크의 대본), 《다나에의 사랑》(그레고르의 대본), 그리고
          자리를 이었다. 이 시기 그의 작곡법은 꽤 보수적이어서, 그의  이 장르에 대한 그의 첫 두 시도인 《군트람》(1894)과 《사라                        《카프리치오》(클레멘스 크라우스의 대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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