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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Education / 교육
유럽의 대표 오페라 작곡가
조아키노 로시니
마이라이프
(Gioacchino Antonio Rossini) QR코드 스캔하고
명곡 듣기 ▲
조아키노 안토니오 로시니(이탈리아어: Gioacchino 1816년 작가 피에르 보마르셰의 희곡을 기초로 <세비야의 컬만, 조이스 디 다나토, 페데리카 폰 슈타테, 누리아
Antonio Rossini, 1792년 2월 29일 ~ 1868년 11월 13일) 이발사>를 작곡하였다. 발렌티니 페라니, 수잔 마시, 베르난데테 쿨렌, 앤 머레이,
는 가에타노 도니체티, 빈첸초 벨리니와 더불어 19세기 하지만 같은 희곡을 기초로 작곡한 대선배 조반니 비비카 제노 등이 있다.
전반의 이탈리아 오페라 무대를 화려하게 장식하며 벨칸토 파이지엘로의 <세비야의 이발사>가 유럽 전역에서 큰
낭만주의의 빛나는 예술성을 꽃 피운 이탈리아의 작곡가다. 인기를 얻고 있었다. 대중의 두터운 신망을 받고 있는 <신데렐라> 에서 전통적인 동화가 일부 변경되었는데,
멜로디의 구성에서는 그 누구도 쉽게 비교되기 어려울 대선배 작곡가와 같은 내용의 오페라를 발표한다는 것이 로시니는 현실주의자로 오페라 안에서 마술 장면을 원하지
정도의 뛰어난 천재성을 선보였다. 젊은 로시니에게는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같은 내용의 않았기 때문이다. 동화 속의 계모와 마법사를 대신하여,
오페라를 발표한다는 것을 알아챈 파이지엘로의 여성팬들이 계부인 돈 마그니피소와 철학자 알리도로를 설정하였다.
소년 작곡가 로시니 극장을 찾아 초연 무대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계부가 친딸들을 감싸고, 의붓딸인 신데렐라를 구박하는
로시니는 소년 시절 작곡에 천재성을 선보이며, 12살 때는 것으로 나온다.
<6개의 현을 위한 소나타>를 작곡했다. 1804년 성당음악의 파이지엘로의 여성팬들은 객석에서 야유와 고함을 지르고,
작곡에 뛰어난 안토니오 테제이 밑에서 정식으로 작곡공부를 휘파람을 부는 것은 물론이고, 무대 위에 유럽에서 유명한 콜브란과 결혼/베토벤과 만남
하고, 1806년 볼로냐 음악학교에 입학하여 첼로,피아노, 불행을 가져다 준다는 검정고양이 까지 풀면서 고의적으로 1822년 자신의 중요한 오페라의 주역을 담당했던, 스페인
작곡 등을 배웠다. 재학 중에 발표한 칸타타 <오르페오의 공연을 방해했다. 다음 공연부터는 특별한 소동없이 큰 출신의 유명 성악가 이사벨라 콜브란과 결혼하였다.
죽음에 대한 아르모니아의 통곡> 으로 상을 받고, 1810 성공을 거두며, 유럽 전역에서 로시니의 <세비야의 이발사 신혼여행으로 유럽의 음악 중심지 오스트리아 제국의
년 베네치아에서 공연한 <결혼 얼음>으로 그 재능을 >가 인기를 얻었다. 수도 빈을 방문하여 선풍을 일으켰다. 빈에서 루트비히
인정받았다. 1813년 <탄크레디>, <알제리의 이탈리아 여인 판 베토벤과 만나기도 했다. 베토벤은 당시 청력을 완전히
> 으로 대성공을 하며, 로시니의 명성은 유럽 전역으로 퍼져 신데렐라 상실해서 통역을 통해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아,
나갔다. 1817년 샤를 페로의 동화를 기초로 <신데렐라>를 작곡했다. 로시니씨 당신이 바로 <세비야의 이발사> 작곡가이군요,
독창 부분과 앙상블으로, 그의 정제된 작품 중 하나라 축하드립니다. 이탈리아 오페라가 계속되는 한 지속적으로
청년 작곡가 로시니 평가된다. 로마의 발레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초연에서 이 공연될 오페라인 듯 합니다. 앞으로도 계속 희가극만 쓰세요.
1814년 <이탈리아의 터키인>, <시기스몬도>를 작곡했지만 오페라는 부정적인 반응을 얻었지만, 곧 이탈리아반도 여러 다른 장르의 오페라는 당신의 스타일에 어울리지 않는 것
실패하며 볼로냐로 돌아갔으나, 그를 고평가한 사업가 국가와 그 외의 국가에서 인기를 얻게 되었다. 1820년의 같습니다."라고 충고한 것으로 전해진다.
도메니코 바르바야에 의해 나폴리 극장의 음악감독으로 영국 런던과 1826년에는 미국 뉴욕에서 공연되었다.
활동을 재기했으며, 바르바야는 로시니에게 200 두카트의 마지막 오페라 작곡 : <기욤 텔>
월급에 나폴리 2개 극장의 음악감독을 맡아줄 것을 19세기 대부분 동안, <신데렐라>의 인기는 < 세비야의 1829년 프리드리히 실러의 희곡을 기초로 오페라 <기욤
요청했으며 1년에 1개 이상의 오페라 작곡을 부가조건으로 이발사>와 견주었지만, 콜로라투라 콘트랄토 성악가가 텔>을 작곡하고,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 그 뒤 로시니는
걸었다. 그에 덧붙여 극장의 별실 사교장에 마련된 드물어지면서, 이 작품은 일반 공연 레파토리에서 물러나게 죽을 때까지 오페라 작곡을 한 곡도 하지 않았다. 로시니는“
도박장에서 나오는 수입의 일정부분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로시니가 르네상스의 것을 예전에는 떠오르는 선율을 따라가면서 악보에 받아 적기만
바르바야 덕에 로시니는 평생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었다. 즐긴 것처럼, 로시니 메조 소프라노들의 새 세대가 다시 하면 되었으나 이젠 악상이 떠오르지 않아 멜로디를 찾아서
새롭게 이 작품의 인기를 보장해주었다. 그 가수들에는 궁리해야 하는 나로서는 도무지 게을러서 체질에 맞질 않아
세비야의 이발사 체칠리아 바르톨리, 에바 포델레쉬, 제니퍼 라모어, 캐서린 오페라 작곡을 집어 치울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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