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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르웨이 대표 낭만주의 작곡가&피아니스트


          에드바르 그리그


                                                                                                          마이라이프
          (Edvard Grieg)                                                                               QR코드 스캔하고
                                                                                                         명곡 듣기 ▲

          에드바르  하게루프  그리그(1843년  6월  15일~1907년  9         를  만나  조언을  받기도  했다.  1864년에는  같은  노르웨이  하십시오."라고 격려했다.
          월  4일)는  노르웨이의  대표적인  낭만주의  작곡가이자  출신의  작곡가  노드로크(Rikard  Nordraak  1842~1866)를
          피아노  연주자이다.  핀란드의  장  시벨리우스,  보헤미아의  만난 것도 이곳에서였다. 노드로크는 그리그에게 민족음악의  1874년에는  입센에게서  그의  희곡  '페르  귄트'에  들어갈
          베드르지흐  스메타나처럼  노르웨이  민속음악을  활용한  중요성을 일깨워주었다. 같은 해에 사촌동생이었던 니나와  연주용 부수음악 작곡을 의뢰하는 편지를 받았다. 그리그는
          작품들을  작곡하여  국민악파로도  여겨진다.  그리그는  약혼을  했는데,  그  때  나온  작품이  가곡  '그대를  사랑해,  이  난해한  희곡에  대하여  상당히  고민했으나  작곡하기
          노르웨이 베르겐 출신으로, 베르겐에는 그의 유산을 기리는  Op.5-3'이다.                                                     시작했는데,  그  작품이  극부수음악  페르  귄트였다.  그  후
          여러  기념물이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그리그홀,  그리그                                                              1876년에 이 부수음악을 가지고 각각 4개의 곡을 가진 2
          아카데미,  에드바르  그리그  합창단이  있다.  또한,  그의  노드로크와 그리그는 노르웨이인 민족음악의 발전을 위해  개의 모음곡으로 만들게 되었다. 이 작품의 초연에는 입센과
          생가였던  트롤하우겐(Troldhaugen)은  현재  에드바르  함께  노력하기로  약속했으나,  노드로크는  2년  뒤인  1866                     그리그  모두  불참하였으나  이후  이  곡이  성공하자  입센은
          그리그 박물관으로 운영중이다.                                년에 요절하고 말았다. 이 때 그리그가 쓴 작품이 '노드로크를  그리그를 존경하게 되었다. 이 곡은 후에 그리그를 평생 먹여
                                                          추모하는  장송행진곡  A단조'이다.  그리그는  노드로크와의  살리는 곡이 되었다.
          생애                                              약속을 지킬 것을 결의하고, 훗날 그것을 지켰다. 그리그는  1877년에는  '현악  4중주  G단조'를,  1883년에는  '첼로
          1843년에  베르겐의  스코틀랜드계  혈통의  가정에서  “노드로크는  음악을  뛰어넘어  무엇이  중요한지  잘  알고  소나타  A단조'를  작곡하는  등  실내악  부분에서도  작곡을
          태어났다.  1849년에  6살  때  악보  읽기와  짧은  피아노  있었다”고 평가했을 정도로 그에게 큰 영향을 준 인물이었다.                       진행하였다. 2년 뒤인 1885년에는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
          연습곡을 배웠다. 하지만 그 과정이 힘들었는지 일기에 "나는  그리그는  인형의  집으로  유명한  헨리크  입센에게  극장의  홀베르 모음곡'을 작곡하였다. 1887년에는 '바이올린 소나타
          얼마 지나지 않아 피아노 연습에 염증을 느꼈다. 그때 조금만  일을  부탁한다.  그러나  극장주  비외르손은  거절한다.  이  3번 C단조'를 작곡하였다.
          더 열심히 피아노를 배웠더라면 음악의 본질에 좀 더 가까이  사건은 노르웨이 국민주의 음악의 발전을 늦췄다는 평가를  이 때 즈음에 그리그는 훈장을 많이 받았다. 이에 대해 그는
          다가갈 수 있었을 텐데…."라고 썼다. 1858년에는 노르웨이  받는다.                                                        “훈장은  정말  쓸모  있는  물건이야.  여행가방  위에  훈장을
          바이올리니스트  올레  불이  그리그와  만났는데,  그는                                                                올려놓으면,  세관원들이  친절하게  대해준다네.”라는  말을
          그리그에게  라이프치히  음악원에  들어갈  것을  권유했다.  노드로크가  사망한  해인  1866년에  그리그는  노르웨이  남기기도  했다.  1894년에는  자신의  피아노  작품인  '서정
          하지만  라이프치히  음악원으로  간  그리그는  억압적이고  음악만으로  이루어진  연주회를  가졌는데,  이  때  나온  소품집'에서  발췌하여  관현악으로  편곡한  '서정  모음곡'을
          보수적인 교육환경에 실망했다. 게다가 담당교수가 쇼팽을  작품이 '바이올린 소나타 1번 F장조'였다. 이 작품을 접하고  작곡하였고,  1896년에  피아노곡  '19개의  노르웨이  민요'
          비난했기  때문에  쇼팽을  흠모했던  그리그는  음악원을  더  감명을 받은 리스트는 이후 그리그를 꾸준히 후원해 주었다.  를  작곡하였다.  한편  1898년에는  베르겐  음악제  감독에
          싫어하게 되었다. 이 시절에 일시적으로 건강이 나빠지기도  1867년에는  니나와  결혼했으며,  이후  니나는  반려자로서  취임해  자신의  음악을  마음껏  뽐내게  되었고,  같은  해에
          했지만  1861년에는  스웨덴에서  피아니스트로  데뷔하기도  그리그를  충실하게  보살폈을  뿐만  아니라  성악가로서도  피아노곡  '3개의  피아노  소품',  관현악곡  '교향적  춤곡'
          했다.  그리그는  1862년에  3년  반에  걸친  학업을  마치고  남편의  작품을  꾸준히  노래했다.  한편  그리그는  2년  뒤인  을  작곡하였다.  그  후  1901년에는  합창곡  '올레  불에게',
          음악원을 졸업했다.                                      1869년에  노르웨이  민요의  악보  “고금의  산중음악”을  1906년에는 합창곡 '오래된 노르웨이 교회 선율에 의한 4
                                                          입수했으며,  이를  면밀히  연구해  훗날  진정한  민족음악을  개의 시편'을 작곡하였으며 1907년 9월 4일에 베르겐에서
          초기에는  주로  피아노곡을  작곡했는데,  이  시기에  나온  작곡하는 데 유용하게 사용했다.                                          사망하였다.  노르웨이  정부는  자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작품으로는 '3개의 피아노 소품'(1860), '4개의 피아노 소품,  1868년에는  피아노  협주곡  A단조를  작곡했는데,  이  곡은  작곡가를  국장으로  예우하였으며,  그의  시신은  화장된  후
          Op.1'(1861)이  있다.  1863년에는  음악적으로  뒤떨어진  그리그의 유일한 협주곡이 되었다. 이 작품을 접한 리스트는  그가 그리워한 어느 피오르의 바위동굴에 안치되었다.
          베르겐을  떠나  덴마크의  코펜하겐으로  옮겨서  약  3년을  "이것이야말로  스칸디나비아의  혼이다."라고  극찬하면서  당시 그가 남겼던 유언은 다음과 같다.
          보냈다. 여기서 유명한 덴마크 작곡가 닐스 가데(1817~1890)           그리그에게 "지금 잘 하고 있습니다. 지금 하는 대로만 계속  "Well, if it must be so.(뭐, 이래야 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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