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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Education / 교육
런던을 그리워하는 파리지앵
레이프 본 윌리엄스-2
마이라이프
(Ralph Vaughan Williams) QR코드 스캔하고
명곡 듣기 ▲
본 윌리엄스가 “내 음악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관계는 1934년 홀스트가 죽을 때까지 지속되었다. 역설적이게도 복고적이지만 헌신적으로 바흐에 매달렸던 본
평했던 홀스트는 17세기 이후 오랫동안 묻혀 있던 퍼셀의 윌리엄스의 공이 컸는지 모른다.
오페라 <디도와 아이네이아스>와 <요정 여왕>등을 잇달아 본 윌리엄스는 9편의 교향곡과 다른 관현악 작품들, 가곡들,
지휘, 연주하면서 영국 음악의 전통을 재조명했다. 이런 오페라와 많은 합창곡들을 발표했다. 다양한 규모와 형식을 1940년부터 1946년까지 본 윌리엄스는 새 영어 찬송가집의
의기투합을 통해 본 윌리엄스와 홀스트는 20세기 초반 영국 가지고 있는 본 윌리엄스의 음악은 민족적이고 세계적인 2 편집자로 활동했다. 이 때의 경험을 그는 “세계에서 최고의
음악계를 주도하는 주역으로 떠올랐다. 가지 원천으로부터 꾸준히 유도되었다. 하나는 홀스트와의 작품들과 가까이 접촉한 2년 동안 많은 소나타와 푸가에서
우정을 지속하면서 채짐한 영국 민요와 성가이고, 다른 받은 것보다 더 좋은 음악 교육을 받았다.” 고 쓰고 있다.
1910년 본 윌리엄스에게 전환점이 찾아왔다. 오랜 기간 하나는 바흐, 헨델, 드뷔시와 라벨의 서구적 전통이 바로 그는 스스로 6곡의 새곡을 작곡했으나, 그 말은 겸손하게도
심혈을 쏟았던 교향곡 1번 ‘바다’가 리즈 페스티벌에서 그해 그것이다. 그러나 그의 음악의 근본적인 본질은 어느 유력한 쓰지 않고 있다. 성가집에서 편곡한 작품들, 찬양가 모음집,
10월 빛을 본 것이다. 오랫동안 악보 상으로만 존재했던 한 작곡가의 영향으로부터 암시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그리고 옥스퍼드 캐롤집 등 그는 일생 동안 국민 음악에 대해
작품이 실제 소리를 내게 됐고, 본 윌리엄스는 초연 직전 심원한 깊이를 가진다. 그의 작품은 “작곡가는 스스로를 순수한 흥미를 명백히 보여준다. 그에 대한 다른 증거들은
며칠간 제대로 먹지도 잠들지도 못할 정도로 초조해했다. 결코 닫지 말고 예술을 생각하며, 동시대의 사람들과 같이 레이트 힐(Leith Hill)음악제의 연례 행사에서 1909년부터
'바다교향곡' 초연 직전인 9월에는 글로스터의 합창 살고 호흡하여 자신의 작품을 사회의 모든 삶의 표현으로 1953년까지 그가 지방 아마추어 가수들 및 연주가들에게
페스티벌에서 <토마스 탈리스 주제에 의한 환상곡>도 만들어야 한다”는 그의 말에 대한 본보기이다. 바흐와 다른 유명 작곡가들의 작품 공연을 지도하였다는
초연되었다. 이 무대에서 함께 선보인 작품이 바로 에드워드 점 및 그동안에 베네딕트 등의 음악의 예로는 현악4중주 2
엘가의 <제론티우스의 꿈>이었다. 본 윌리엄스의 출세작이 제1차 세계대전에 영국 왕립의무대원으로 참전했던 본 곡, ‘악기들의 모든 결합’을 위해 쓴 ‘가계음악’(Household
된 이 환상곡에는 작곡가가 채집하고 발굴했던 튜더 왕조 윌리엄스는 전쟁이 끝난 뒤인 1919년 모교인 왕립음악대학 Music)과 3중 현악 합주를 위한 ‘합주 협주곡’등이 있다.
시대 영국 음악의 정취가 그대로 녹아 있었다. 구스타프 교수로 부임했다. 당시 작곡가는 47살이었다. 1921년에는 특별한 행사를 위해 쓴 작품들도 있는데, 1950년의 합창제를
말러의 천인교향곡 초연에도 참석했다. 바흐 합창단의 지휘자로 부임했고 아내의 신병 치료로 1928 위해 쓴 ‘사계절의 민요들’ 그리고 관현악과 16인의 솔로를
년 사임할 때까지 <마태 수난곡>과 <요한 수난곡>, <B 위한 ‘음악의 세레나데 (Serenade to Music)’등이 있으며,
이 때 그는 창조적 구원을 외국 모델을 모방함이 아니라 단조 미사> 등을 연주하며 바흐의 종교음악을 의욕적으로 확성기와 소프라노 솔로 그리고 합창과 관현악을 위한 ‘
자신이 태어나 자라온 영국의 여러 원천들을 사용하여 재조명했다. 추수의 노래 (A song of Thanksgiving)' 및 기타 영화음악
창조적으로 재생성시키는 데서 찾아야 함을 깨달았다. 등도 작곡한다.
그리하여 그는 영국의 민요와 엘리자벳 시대의 음악들에 당시 바흐 연주는 300명에 이르는 합창단원을 기용해
관심을 기울이고, 이어 음악적 시민의식이라는 자신의 독일어 가사를 때때로 영어로 바꿔 부르고 하프시코드 본 윌리엄스는 말년의 인터뷰에서 “‘모더니즘이냐
철학을 발전시켜 나간다. 이러한 흥미와 이상을 그는 대신 피아노를 사용했다. 작곡 당대의 옛 악기와 연주법을 전통적이냐’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중요한 건 ‘자기 자신에게
왕립음악대학 동창생이자 친구인 구스타브 홀스트(Gustav 적극적으로 되살리는 ‘시대연주’가 대세를 이루는 오늘날의 충실한가’라는 점”이라고 했다. 70살의 작곡가가 존
Holst)와 함께 추진하여 수많은 민요의 채집에 나선다. 관점에서는 지극히 전통적이고 낡은 연주법이지만, 본 버니언의 종교소설 <천로역정>에 바탕을 둔 교향곡 5번을
홀스트와의 이렇게 맺어진 우정은 매우 특별한 것으로서 그 윌리엄스는 타계하기 직전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바흐의 발표했을 때 모두 ‘백조의 노래’가 될 것이라고 여겼지만, 86
두 작곡가들은 서로의 작품을 서로 칭찬하고 비판해주면서 종교곡을 지휘할 만큼 애착을 쏟았다. 영국이 20세기 후반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16년간 4곡의 교향곡을 더
자신의 기법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교우 ‘시대연주’의 강국으로 떠오를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쏟아냈다.
[다음 주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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