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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Education / 교육
프랑스의 작곡가이자,
오르가니스트, 피아니스트, 교사
가브리엘 포레
마이라이프
(Gabriel Urbain Faure) QR코드 스캔하고
명곡 듣기 ▲
가브리엘 위르뱅 포레(프랑스어: Gabriel Urbain Faure, 1877년에는 피아노와 노래를 위한 가곡집 '멜로디' 일부를 음악 스타일
1845년 5월 12일~1924년 11월 4일)는 프랑스의 작곡가이자, 출판하며 작곡가로서 본격적인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 같은 포레의 음악은 부드럽고 섬세하며, 감정 표현이 절제된
오르가니스트, 피아니스트, 교사였다. 파리의 니데르마이어 해 약혼도 했지만 이내 파혼하고, 이후 오랫동안 독신 생활을 세련미를 지녔다. 초기에는 슈만, 쇼팽, 생상스 등의 영향을
음악학교에서 공부하고, 카미유 생상스에게서 가르침을 했다. 받았지만 점차 독창적인 화성과 선율을 발전시켜 후기에는
받았으며, 교회의 오르간 연주도 하였다. 파리 음악원의 매우 개인적인 스타일을 확립했다. 특히, 풍부한 화성과
원장을 역임하였고, 제자로는 모리스 라벨 등 뛰어난 1880년대 후반부터는 본격적으로 오페라, 관현악곡, 미묘한 전조(modulation)를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음악가가 많이 있다. 클로드 드뷔시보다 앞서서 현대 프랑스 실내악곡에 도전했다. 1887년에 발표한 관현악곡 '
음악의 기초를 닦았다고 할 수 있다. 파반느'가 큰 인기를 얻으면서 대중적 성공도 경험했다. 교육자 활동
포레는 파리 음악원(Conservatoire de Paris) 원장을
실내악이나 가곡에 뛰어난 작품이 많다. 작품에 현악 4 1896년에는 파리 음악원 작곡과 교수로 임명되었다. 이후 지냈으며, 모리스 라벨, 조르주 오릭, 나디아 불랑제 등
중주곡, 피아노 5중주곡, 바이올린 소나타가 있으며, 그중 후학 양성에 힘쓰며 모리스 라벨, 조르주 오릭, 나디아 중요한 20세기 음악가들을 가르쳤다.
종교 음악의 걸작인 〈진혼곡〉, 가곡 〈꿈을 꾼 후에〉, 〈달빛〉 불랑제 같은 훗날의 거장들을 가르쳤다.
등이 유명하다.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들은 일반적으로 초기 개인적인 어려움
작품들이지만, 후기 작품들은 화성적으로나 선율적으로 말년이 되자, 포레는 프랑스에서 동시대 최고의 작곡가로 생애 후반에는 청각 문제가 생겨 고음 청취가 어려웠지만,
더욱 복잡한 스타일을 띄며, 높이 평가받는다. 인정받았으며, 1905년에는 파리 음악원 원장에 올랐다. 그 작곡 활동을 계속 이어나갔다. 이 때문인지 후기 작품들은
동안 음악원 내부 개혁을 추진하면서 보수적인 분위기를 특히 더 내성적이고 실험적인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포레는 예술을 존중하는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특별히 혁신하고 프랑스 음악 교육을 현대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음악적 전통이 있는 가문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했다. 1922년 프랑스 공화국 대통령이 주관하는 전례 없는 대표 작품
음악적 재능을 보였으며, 9세 때 파리의 니더마이어 음악학교 국가적 음악 헌정식이 파리에서 열렸다. 그러나 프랑스 • 레퀴엠(Reqiuem in D minor, Op. 48): 그의 가장 유명한
(Ecole Niedermeyer)에 보내져 교회 오르가니스트와 외 지역에서는 그의 음악이 널리 받아들여지는 데 수십 작품 중 하나로, 죽음을 두려움이나 고통이 아닌 평화롭고
합창 지휘자로서의 교육을 받았다. 특히 카미유 생상스의 년이 걸렸으며, 예외적으로 영국에서는 생전에 많은 팬을 아름다운 이별로 묘사했다.
가르침을 받았는데, 생상스는 포레의 평생 친구이자 멘토가 보유했다. • 파반느(Pavane, Op. 50): 부드럽고 우아한 관현악곡으로
되었다. 사랑받고 있다.
포레의 음악은 낭만주의의 끝과 20세기 2/4분기의 • 가곡(Melodies): 포레는 프랑스 가곡(멜로디)의 대가로,
1865년 학교를 졸업한 후, 포레는 오르가니스트와 교사로 모더니즘을 연결하는 음악으로 묘사된다. 그가 태어났을 부드럽고 세련된 노래들을 다수 작곡했다.
활동하며 검소한 생활을 이어갔다. 이로 인해 작곡에 할애할 때는 프레데리크 쇼팽이 여전히 작곡을 하고 있었으며, • "Apres un reve(꿈속에서)", "Clair de lune(달빛)" 같은
시간이 부족했다. 중년에 접어들어 성공을 거두면서도, 사망할 즈음에는 재즈와 제2빈악파의 무조 음악이 연주되고 곡이 유명합니다.
라마들렌 성당의 오르가니스트, 파리 음악원의 원장 등 있었다. 말년 20년 동안에는 점점 심각한 난청에 시달렸다. • 실내악: 피아노 삼중주, 현악 사중주, 첼로 소나타
중요한 직책을 맡았기 때문에 여전히 작곡에 몰두할 시간이 이 시기의 작품들은 그의 초기 음악이 지닌 매력과는 달리, 등 여러 걸작을 남겼다.
부족했다. 따라서 여름마다 시골로 떠나 작곡에 집중할 때로는 모호하고 내성적이며, 때로는 격렬하고 열정적인 • 피아노 작품: '녹턴', '바르카롤', '임프롬프튀' 등에서 그의
시간을 따로 마련해야 했다. 성격을 띄었다. 섬세한 피아노 스타일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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