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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Education / 교육







            서양 음악사

                                                                                             마이라이프
            가브리엘 포레                                                                        QR코드 스캔하고

                                                                                             명곡 듣기 ▲



            1845년에 프랑스 남부 파미에르에서 태어났다. 1854                는 반영하지 않았다. 1883년에는 유명한 조각가의 딸  지 못해 홧김에 사표를 던진 마스네를 대신해 작곡과
            년에  아버지에  의해  교회음악학교에  입학하였으며,  마리 프레미에와 결혼했다.                                                 교수가 되었다.
            1861년에는 생상이 부임해서 슈만, 리스트, 바그너 등  그러나 결혼 생활에 충실하지 못하였고, 염문을 뿌리
            여러 작곡가의 음악을 소개해 주었다.                           기도 하였다.                                         포레 밑에는 같은 국가 출신의 작곡가 라벨, 에네스쿠,
                                                                                                           불랑제 등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1865년에는 피아노, 화성학, 작곡, 대위법 등에서 수석               1892년에는 가수 엠마 바르닥과 사랑에 빠졌는데, 그
            으로 졸업하여 성 소뵈르 교회 오르가니스트로 취직했                   녀의 딸 돌리를 위해 피아노곡 돌리 모음곡을 작곡하기                   포레는 자기의 작곡 성향을 제자한테 강요하지는 않았
            다. 그러나 신부의 설교가 지루하다고 느낀 포레는 일탈                 도 하였다.                                          다.
            을 일삼았고, 결국 4년 뒤에 해임을 당했다.
                                                           1888년에는 레퀴엠을 작곡하나, 마들렌 성당의 신부는  1905년에는 로마대상에서 라벨이 심사대상에서 제외
            1870년에는 프로이센 전쟁이 일어나자 자원입대를 했                  그리 호의적이지 않게 반응했다.                               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일로 뒤브아가 원장에서 사
            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엘리제 생 쉴피스의 성가대장으                                                                 퇴하고 포레가 그 직위를 맡게 되었다.
            로 취임했는데, 즉흥연주를 자주 즐겼다.                         1892년에는 에네스토 귀로가 사망하자 생상은 포레에
                                                           게 교수가 되는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포레의 음악을  포레는 여러가지 개혁에 착수하였는데, 심사직을 모두
            1874년 생상이 수석 오르가니스트로 일하는 마들렌 성                 좋아하지 않았던 다른 음악원 동료 교수들과 음악원 원                   외부 인사로 채웠고, 레파토리를 확대하였고, 바그너의
            당의 보조 오르가니스트가 되었다.                             장인 앙브로와즈 토마는 결사적으로 반대하였다.                       오페라의 아리아를 부를 수 있게 되는 등의 작업을 하
                                                                                                           였다.
            생상이 이 자리를 비우는 일이 잦아 포레가 대신 연주                  "포레! 절대 안 돼. 만약 그가 교수가 된다면 내가 사표
            했는데, 정작 그는 오르간 곡은 별로 작곡하지 않았다.  를 던질 거야."                                                      그러나 학생들에게 개인 레슨을 통해 수입을 올렸던 교
            1878년에는 바그너의 라인의 황금, 발퀴레, 파르지팔                                                                 수들이 줄줄이 음악원을 떠난 것이다.
            등을 관람하였다.                                      결국 포레는 지방 음악원 감독관을 맡게 되었다. 1896
                                                           에 파리 음악원 원장 토마가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테                  1911년에 청각이 이상이 생긴 포레는 1920년에는 원장
            포레는 바그너의 음악은 존경하였지만 자신의 음악에                    오도르 뒤브아가 원장으로 취임했고, 포레는 원장이 되                   직을 사임하였고, 1924년 11월 4일에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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