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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Education / 교육



          프랑스 출신의

          작곡가,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


          에릭 사티                                                                             QR코드 스캔하고
                                                                                               마이라이프

                                                                                              명곡 듣기 ▲



          “‘음악적’이라는  평은  썩은  분비물과  같다.  ‘문학               업을 받았다. 1878년, 사티의 조모도 세상을 뜨게 되고  여러가지 기행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늘 우산을 들고
          적’이라는  평도  마찬가지이다.  ‘화가적’이라는  것                 사티와 그의 동생은 다시 파리로 가서 재혼한 아버지와  다녔지만 정작 비가오면 우산이 비에 젖을까봐 코트 속
          도 다를 바 없다… 친애하는 친구, 당신의 생각은?”                   다시 같이 살게 된다.                                    에 고이 넣은 채 걸어다녔다든가, 하얀 음식(하얀샐러

          -에릭 사티                                                                                          드, 껍질없는 생선, 백색 소시지 등)만 먹거나, 1인 종교
                                                          1879년에 사티는 파리 음악원에 입학하여 음악을 배                   를 만든다든가, 아님 자신 스스로를 수취인으로 해 자

          에리크 알프레드 레슬리 사티(프랑스어: Éric Alfred               웠으나 재능이 없다는 평가를 받는 바람에 한동안 방                    기 집 주소로 편지를 보내는 등의 일들이 있었다. 이러
          Leslie Satie, 1866년 5월 17일 ~ 1925년 7월 1일)는 프    황했다. 1882년 입영장을 받아 군에 입대했지만 전혀  한 성품이 작품에도 반영되어, 제목 중에 괴상한 것들
          랑스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이다. 1884년 그의 첫                   적응하지 못해 탈영했다. 이후 1887년에 사티는 고향                  이 상당히 많다. 프랑스 6인조 등 후배 작곡가들에게도
          작품에 에리크 사티(프랑스어: Erik Satie)라고 c 대신             을 떠나 몽마르트르에서 생활하며 여러 예술가들과 어                    약간 웃기는 아저씨 취급이었다. 대중 음악계에서도 영

          k를 사용해 서명함으로써 Erik Satie라는 이름으로 알               울리면서 짐노페디등의 자신의 대표작을 공개하며 주                     향력이 큰 편이라 미니멀리즘이나 앰비언트의 선구주
          려지게 되었다.                                        목을 받았다.                                         자로 꼽힌다.

          작곡 이외에도 사티는 가명을 사용해 다다이즘 전문지                    1893년 화가이자 그림모델이었던 수잔 발라동과 사랑                   사티는 키가 182cm 정도로 상당히 컸지만, 그해 비해
          391나 대중문화를 다루는 Vanity Fair 등에 많은 글을             에 빠지게 되는데, 결혼을 청하였으나 거절당했다. 그러                  몸무게는 60kg이 채 안 되는 매우 마른 체격이었다고
          투고하였다.                                          나, 수잔이 사티가 살고있던 곳의 옆 방으로 이사하면서                  전해진다.

                                                          연애관계를 지속했는데, 이때 사티의 창작욕이 불타올                    주요 작품
          사티는 20세기 파리의 아방가르드 작곡가들 중에서도
          상당히 독특한 인물로 꼽히며, 미니멀리즘이나 부조리                    라 그림을 그리거나 새로운 작곡을 했다. 그러나 몇 개                  6개의 <그노시엔느> 1891년
          극 등 20세기 예술운동의 선구자로도 불린다.                       월 후 수잔이 다른 곳으로 이사가며 영영 헤어지게 되                   가난한 자를 위한 미사 1895년
                                                          었고, 큰 슬픔에 빠진 사티는 이후 죽을 때까지 다른 여                 <배 모양을 한 세개의 소품> 1903년
          생애                                              인과 사랑을 나누지 않았다.                                 <정말로 야무진 데가 없는 개를 위한 변주곡> 1912년
          에리크 사티는 노르망디 (레지옹) 칼바도스주 옹플뢰르                                                                   <끝에서 두 번째 사상> 1915년
          에서 태어나 네 살때 아버지가 파리에서 번역가로 일을  사티는 작곡 이외에도 가명을 사용해 다다이즘 전문지                                     교향적 극작품 <소크라테스> 1918년 등

          하게 되어 파리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그러나 몇 년  391나 대중문화를 다루는 베니티 페어 지등에 많은 글
          후, 그의 어머니가 세상을 뜨고 그는 다시 동생 콘라드                  을 투고하였다. 음악가 활동 이외에도 미니멀리즘이나                    짐노페디 1번이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뜻
          와 함께 옹플뢰르로 돌아가 조부모와 같이 살게 된다.  부조리극 등 20세기 예술운동에도 적극 참여한 선구자                                    을 직관적으로 알기 어려운 어휘를 조어해서 제목을 작
          사티는 고향에서 한 오르가니스트에게 그의 첫 음악 수                   로 인정받고 있다.                                      성하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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