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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Education / 교육
후기 낭만주의 작곡가
조르주 비제 마이라이프
QR코드 스캔하고
명곡 듣기 ▲
생애 지 못한 채 초연으로부터 3개월 뒤인 1875년 6월 3일에 비제는 악보를 펼쳐 놓고 매우 빠르게 속독하며 동시에 리
비제는 1838년 파리 근교의 음악가 가정에서 태어났다. 지병인 심근경색으로 숨을 거뒀다. 불과 향년 36세였다. 스트가 연주했던 템포 그대로 아까 전의 퀄리티를 유지하
성악 강사인 아버지에게서 음악 교습을 받은 비제는 일찍 더욱이 이날은 비제의 결혼 8주년 기념일이었다. 며 완주했다고 한다. 이를 옆에서 목도하던 리스트는 머
재능을 보여 10살 때 파리음악원에 입학했다. 파리음악원 쓱한 태도로 ‘젊은 친구, 내가 잘못 알았구만. 세 사람이었
에서 작곡, 피아노, 오르간을 배운 그는 주로 샤를 구노의 작품 성향 네. 공평하게 말하자면 셋 중에서 가장 젊은 자네가 우리
영향을 많이 받았다. 비제는 남유럽, 특히 남프랑스 또는 프로방스 특유의 극적 보다 더 두드러지게 뛰어나다고 말해야겠군.’ 이라 말했다
이고 화려한 색채의 음악에서 강점을 드러내었다. 또한 오 고 한다.
1856년 18세의 비제는 로마대상 작곡 콩쿠르에 칸타타 ‘ 페라, 극음악을 주로 쓴 작곡가답게 등장인물 표현, 감정
다윗’을 출품해 입상, 이듬해에는 마침내 대상을 차지한다. 표현, 극적 효과를 나타내는 데 강하였다. 프리드리히 니체 맨 처음 리스트가 한스 폰 뷜로를 언급했을 때, 그의 삶에
부상으로 로마에 3년 동안 장학생으로 유학을 갔다온 후, 는 이를 바탕으로 그를 ‘지중해의 바그너’라고 칭하기도 했 서 피아니스트로서 최상위권의 수제자인 타우지히가 함께
비제는 오페라에 주력한다. 다. 그리고 자신이 정리한 ‘디오니소스적’인 음악, 즉 원초 언급되지 않은 걸로 봐서는 아마 리스트가 좀 더 젊었을
적이고 감성적인 예술의 음악이라고 지칭하였다. 때, 최소한 전성기의 황혼은 누리고 있었을 40세 중년 시
1863년 ‘진주조개잡이’로 오페라 작곡가로서 첫 이름을 기 즈음의 해프닝인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당시의 리스트
알린 후, 계속해서 작곡에 몰두하지만 기대만큼 성과를 내 카르멘, 아를의 여인에서는 극과의 절묘한 조화, 새로운 기 가 이 정도로 인정할 정도면 실력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지 못했다. 그러던 중 1869년 로마 유학의 경험을 바탕으 법 등으로 이후 피에트로 마스카니, 지아코모 푸치니등의 작
로 쓴 ‘로마의 회상’ 모음곡을 발표하였고, 같은해 스승의 곡가들에게 영향을 끼쳐 사실주의 오페라의 시초가 되었다. 카르멘이 초연된 직후, 프랑스 정부에서 최고의 국가적 명
딸과 결혼한다. 비제는 교향곡 같은 장르보다 오페라 작곡 예로 인정받는 레종 도뇌르 훈장 수여를 발표했다. 하지만
가로서 성공하기 갈망하였지만 하필이면 당대 최고의 오 그 외 여기에는 웃지못할 사연이 있는데, 그의 작품들 중 하나인
페라 작곡가인 바그너와 베르디의 시대에 살았던 탓인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오히려 당대에는 피아니스트로서의 <아를의 여인>이 당대의 명작가 알퐁스 도데가 쓴 동명의
상당수의 작곡물들이 두 작곡가의 아류라고 평가절하 되 재능이 더 높게 평가됐었다고 한다. 생계를 위해 반주자 정 희곡인 줄로 착각했다는 것. 게다가 그가 얼마 안되어 사망
는 상황이 빈번했다고 한다. 때문에 떨어지는 자존감 때 도로만 활동했는데도 그의 실력은 당대의 명 오르간 연주 하는 바람에 실제 수상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문에 폭음을 하는 등 건강을 좀먹는 행동을 일삼곤 했다. 자로 명성을 날린 절친 카미유 생상과 동급으로 평가됐었
다. 여기에 그가 청년기 때 프란츠 리스트와 만났던 일화는 남겨진 작품 수가 적다. 요절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비
1872년 알퐁스 도데의 소설을 각색한 ‘아를의 여인’의 극 이를 더욱 부각시킨다. 제 자신이 생전에 마음에 안 든 작품들은 다 불태웠기 때
음악을 작곡해 성공하고 그중 몇곡을 모아 모음곡으로 발 문이다.
표한다. 하지만 그의 일생일대의 걸작은 1875년에야 나 당시 리스트는 한 소규모 연주회에서 매우 어려운 피아노
온다. 바로 카르멘. 비제는 이 오페라에 엄청난 기대를 걸 곡을 초연하고 이 곡을 완주할 수 있는 테크니션은 자신과 무대극 작품
었으나 오페라 코미크 극장에서 초연될 때의 반응은 별로 한스 폰 뷜로 이외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때 1854년《La prê trêesse》, 오페레타
였다. 마침 비제와 같이 있었던 작곡 선생이 비제한테 실력을 보 1857년《Le docteurê Mirêacle》, 오페라 부프
여주길 종용하자 비제는 곧장 피아노 앞으로 가서 방금 전 1859년《Don Prêocopio》, 오페라 부프
결국 건강이 안 좋은 상황에서 초연 실패로 결정적인 타격 에 리스트가 쳤던 곡의 가장 어려운 부분을 완벽하게 연주 1863년《진주조개잡이》, 오페라
을 맞은 그는 카르멘이 빈에서 대성공하는 모습을 지켜보 해냈다고 한다. 놀란 리스트가 비제한테 악보를 건네 주자 1867년《La jolie fille de Perêth》, 오페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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