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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Education / 교육





          과학과 경험을 신봉했던


          카미유 생상스


                                                                                                          마이라이프
          (Camille Saint Saens)                                                                        QR코드 스캔하고
                                                                                                         명곡 듣기 ▲

          샤를카미유 생상스(1835년 10월 9일 ~ 1921년 12월 16일)         채 되지 않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 시기동안 프랑스 음악  특히 매료된 분야는 천문학이었다.
          는 프랑스의 작곡가, 오르가니스트, 지휘자, 피아니스트이며,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여기서 가르친 제자들 중에는
          특히 〈피아노 협주곡 2번〉, 〈첼로 협주곡 1번〉 , 〈바이올린  가브리엘 포레가 있는데, 포레의 제자 중에는 훗날 프랑스를  유년기에  파리  천문대에  초대받아  망원경으로  달  표면을
          협주곡 3번〉 ,〈서주와 론도 카프리치오소〉, 〈교향곡 제3번  대표하는  작곡가가  되는  모리스  라벨도  있었다.  이들은  관찰한 생상스는 이 경험에서 평생의 싹이 될 커다란 영감을
          '오르간'〉, 모음곡 〈동물의 사육제〉, 교향시 〈죽음의 무도〉,  모두  생상스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으며,  그를  천재로서  받았다.  당시  파리에는  피에르  시몽  라플라스,  프랑수아
          오페라  〈삼손과  데릴라〉로  알려져  있다.  섬세한  음색과  존경했다.                                                     아라고 등의 저명한 천문학자들이 활동하고 있었으며 방돔
          풍요로운 악기구성으로 유명하다.                                                                               광장과 콩코드 광장에서는 거치식 망원경을 설치한 사람들이
                                                          생애                                              돈을 받고 망원경으로 천체를 관찰할 수 있게 해주었다.
          생상스는  어린  시절부터  신동으로  평가받았으며,  10세의  생상스는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정부  서기였던  그의
          나이에  첫  콘서트  데뷔를  했다.  이후  파리  음악원에서  아버지는  그가  태어난  후  3달  만에  죽었다.  절대음감의  여러 차례 동전을 내고 밤하늘을 탐색한 생상스는 아라고의
          공부한  후,  전통적인  교회  오르가니스트로서의  경력을  소유자였던 그는 2살 때 피아노를 치기 시작하였으며 곧바로  『대중천문학(전 4권)』을 탐독한 뒤 ‘천문학이야말로 최고의
          쌓았다.  처음에  파리의  생메리  성당(Saint-Merri)에서  작곡을 시작할 수 있었다.                                          과학이다’라며 경탄했다.
          오르가니스트로 활동했으며, 1858년부터는 프랑스 제국의                                                                 23세 때 그는 자신의 작품 일부에 대한 저작권을 악보 출판사
          공식 교회였던 라마들렌 성당에서 근무하였다. 20년 후, 교회  1839년 3월 22일로 날짜가 기록된, 최초로 작곡한 곡인 《피                        지로에 넘기고 받은 돈으로 당대 최고의 광학자 세크레탄이
          오르가니스트 직을 떠난 그는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에서 큰  아노를 위한 작은 단편》은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보관  제작한 구경 8센티미터의  망원경을 구입했다. 개인이 구할
          인기를 얻은 자유로운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로서 성공적인  중이다. 그의 조숙함은 음악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수 있는 망원경으로는 당시 최고의 사양이었다.
          경력을 이어갔다.                                                                                       가족들은  그가  음악에서  멀어질까봐  크게  걱정했다고
                                                          그는 3살 경에 읽고 쓸 줄 알았으며 7살 때는 라틴어를 완전히  생상스는  훗날  회상했다.  그는  이  망원경으로  갓  발견된
          젊은  시절,  생상스는  당대  가장  현대적인  음악에  열정을  터득했다.  12세  때  모차르트,  헨델  등  작곡가들의  곡으로  도나티  혜성의  행로를  추적했고  이중성double  star과
          가졌으며,  특히  로베르트  슈만,  프란츠  리스트,  리하르트  연주회를 열었다. 13세에 파리 음악원에 들어갔고, 18세에  별들의 빛깔 차이를 관찰했다.
          바그너의 곡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생상스는 일반적으로  《제1교향곡》을 썼다. 28세에 마들레느 교회에서 오르간을
          고전적인 전통을 따르는 경향이 강했다. 그는 음악사에 대한  쳤으며, 29세에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들 중 하나인 《제3                             생상스가  당당하게  ‘나는  천문학자’라고  자신했던  것은
          깊은  지식을  지닌  학자였으며,  프랑스  작곡가들이  확립한  교향곡》을  작곡하였다.  36세  때에는  '국민  음악  협회'를  아니다.  그는  스스로를  ‘비전문가로서  천문학에  대해  가질
          기존 음악 형식을 고수하려 했다. 이러한 태도는 그의 말년에  설립하여 프랑스의 음악을 부흥시키는 데 힘썼다. 46세에  수 있는 최고의 흥미와 열정을 지닌 자’라고 소개하곤 했다.
          인상주의와  표현주의  음악을  추구한  젊은  작곡가들과의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  그리고  51세  때  그의  사후에도  특히 천체의 움직임을 해석하는 데 필요한 수학 지식이 없는
          갈등을 초래했다. 생상스의 작품에는 신고전주의적 요소가  사랑받게  될  《동물의  사육제》를  작곡하였다.  만년인  1921                         것을 늘 아깝게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1893년
          포함되어 있어, 훗날 스트라빈스키나 프랑스 6인조의 작품을  년에는 3개의 목관악기 소나타인 《오보에 소나타 라장조》,  프랑스 천문학회 정회원이 되었다.
          예견하는 측면도 있었으나, 그는 사망 당시와 그 주변 시기에  《클라리넷  소나타  내림  마장조》,  《바순  소나타  사장조》
          종종 반동적인 인물로 간주되었다.                              를  잇달아  작곡했으며,  같은  해  12월  16일에  프랑스령  1887년  이  학회를  창립한  천문학자  카미유  플라마리옹
                                                          알제리에서 사망했다.                                     (1842~1925)의  권유에  의한  것이었다.  생상스는  1881년
          생상스는 평생 동안 단 한 번의 교육직을 맡았는데, 그것은                                                                프랑스  한림원Institut  de  France  회원이  되어  지식계의
          파리의  "고전  및  종교  음악  학교(Ecole  de  Musique  천문학에 매료된 음악가                                        명사들과 교유했으며, 플라마리옹은 천문학에 열정을 가진
          Classique et Religieuse)"에서의 교수직이었다. 비록 5년이  당대  혁신적  진보를  경험하던  과학  분야에서도  생상스가  명사를 모셔옴으로써 학회의 명성을 높이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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